금요일 저녁, 나는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근처 스타벅스에서 인터뷰 섭외에 실패하고 있었다. 부장이 꼭 따내라고 주문한 인터뷰지만, 인터뷰이가 극구 사양했다. 거듭된 나의 부탁과 설득에 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그와 세 번째 전화통화를 하게 된 것이었다. 기사가 나가서 괜히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는, 생활인으로서의 그의 거절에 나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 ‘아, 부장한테 뭐라고 보고하지’, ‘날려 먹은 인터뷰는 뭐로 벌충하지’ 하는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인데다 친구와 떡볶이를 먹기로 했으니까. 스타벅스 밖으로 나와 친구의 회사로 걸어 올라가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3월 초인데도 날이 춥지 않았다.
원래는 요즘 잘 나간다는 수제맥주 펍에 가려 했었다. 하지만 친구가 “이 근처에 ‘남도분식’이라고 즉석떡볶이 집 있거든. 거기 어때?”라고 말한 순간 수제맥주 따위는 싹 잊었다. 중학 시절부터 그녀와 내가 함께 먹은 떡볶이 그릇을 바닥부터 쌓으면 천장에 닿는다. 그러한 친구와의 ‘불금 떡볶이’라니.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나.
우정의 원형
2019년 3월, 남도분식.
사실 우리는 반포 애플하우스 파다. 그녀가 반포로 이사 간 이후 애플하우스는 우리 일당의 거점이 됐다. 그 전 학창 시절에는 잘게 썬 양배추가 떡볶이에 그득한 ‘소문난 분식’, 짜장 떡볶이가 유명한 ‘일번지 분식’을 드나들었다. 아쉽게도 두 집 모두 지금은 없어졌다.
남도분식은 콩나물 토핑이 가득 올라간 즉석떡볶이를 내는 집이었다. 우리는 얇은 만두를 매콤달콤한 소스를 얹은 양배추와 함께 내주는 납작만두도 주문했다. 애플하우스에 가면 비빔만두를 1인 1접시 하는 게 우리의 룰이라서, 만두도 주문하는 게 옳다고 느꼈다.
보글보글 끓는 즉석떡볶이를 나눠먹으며 회사, 아이들, 남편 이야기를 나눴다. 나보다 먼저 결혼해 나보다 먼저 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그녀는 내게 육아 선배다. 중간에 오빠(친구의 남편)가 전화해 우리 사이를 방해한 것을 빼면 완벽한 저녁식사였다.
2차는 남도분식 건너 카페에서 아인슈페너에 마카롱을 먹었다. 삼겹살에 소폭 몇 잔을 곁들이는 것이 직장인다운 불금 저녁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고민도 나누던 사이에선 그렇지 않다. 매콤달콤한 떡볶이에 찐득한 수다가 달라붙으면 세상 근심은 증발해버리고 마음은 보송해진다.
어미새가 날라주는 먹이만 받아먹던 아기새 시절을 지나 생애 처음으로 나 스스로 먹기로 결정한 음식은 떡볶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후문 앞에는 떡볶이 포장마차가 두어 개 있었다. 50원어치는 떡 다섯 개에 오뎅 하나, 100원어치는 떡 열 개에 오뎅 두 개를 비닐 씌운 멜라닌 접시에 담아줬다. 나와 희나는 하굣길에 50원씩 내고 떡볶이를 사먹었다. 비닐에 묻은 양념을 떡으로 야무지게 그러모아 먹고 달달 후끈해진 입맛을 다시며 함께 길을 걸었다. 그게 내 마음에 박힌 우정의 원형이다. 여느 때처럼 떡볶이를 사먹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희나가 전학가게 됐다고 말했다. 내가 울자 희나도 따라 울었다.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사먹던 꼬마는 곧 친구들과 분식집 테이블에 턱하니 앉아 떡볶이에 순대, 튀김, 라면을 알차게 주문해 먹는 중학생이 되었다. 이즈음 직접 끓여 먹는 즉석떡볶이와 떡볶이에 밥을 볶아먹는, 한 단계 진화된 떡볶이의 세계에 눈을 떴다. 대학 시절 우리 학교 앞에는 마땅한 즉석떡볶이 집이 없어 이화여대 앞 ‘오리지널 분식’을 드나들었다. 이곳은 회사와도 멀지 않아 야근 행군을 하던 어느 날 저녁, 같은 부서 남자 선배 둘을 꼬드겨 오리지널 분식에 간 적이 있다. 나보다 열 살쯤 많은 선배는 즉석떡볶이가 대체 뭐냐고 물었다. 충격이었다. 그가 종업원에게 “여기 생맥주 있나요?” 하고 물었을 때 또 충격을 받았다. 나는 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떡볶이에 맥주를 곁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했을까.
일의 세계를 떠나는 혼자의 식사
퇴근하는 길
회사 다니면서 일주일에 하루이틀은 혼자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야근하지 않고 저녁 약속도 없는데 남편이 늦는 날에는 혼밥을 했다. 아이들은 외갓집에서 6시 무렵 저녁을 먹고, 언제부턴가 친정엄마에게 내 저녁밥까지 의지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면 나는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값이 저렴한데다 1인분이 가능하기 때문에 혼밥으로 적당했다.
떡볶이가 당기는 날은 정해져 있었다. 차분하게 앉아 기사 쓰는 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한 날에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오전에 여의도에서 어느 기업의 대표를 인터뷰하고, 바로 마포로 넘어가 공인중개사무소를 돌며 부동산 관련 취재를 한 어느 여름 날, 점심 때가 지나 배가 고팠지만 꾹 참았다. 왜냐면 지하철역 앞에 ‘오마뎅’이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일을 다 마치고 오후 3시에 가래떡 떡볶이에 꼬치 어묵을 먹었다. 하루종일 전화를 붙들고 취재하느라 입에서 단내가 나는 날에는 집에 가기 전에 ‘죠스떡볶이’나 ‘루비떡볶이’, 은마지하상가의 ‘튀김아저씨’에 들렀다. 배달음식 앱의 노예가 된 이후로는 지하철에서 앱에 뜬 분식집들의 메뉴와 배달료, 후기를 둘러보다가 열 정거장쯤 남았을 때 한 곳을 골라 주문 버튼을 눌렀다. 그러면 나보다 떡볶이가 먼저 집 앞에 도착해 있곤 했다.
뜨끈하고 달큰한 떡볶이가 배 속으로 들어오면 친밀하고 안전한 세계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고, 서로 날을 세울 이유가 없으며, 내가 상대에게 탐하거나 상대가 내게 탐하는 것이 없는 식사의 시간. 비록 친구들과 함께 하지 않더라도 떡볶이의 맛은 마음 깊은 곳의 어떤 평화를 일깨워 낯선 사람들과의 피곤한 관계에 둘러싸인 일의 세계를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해줬다.
친구와 남도분식 가는 길에 큰 아이 준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친구들과 동네 떡볶이 집에 가도 되냐고, 할머니한테 늦는다고 전해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기분 좋게 허락했다. 내 아이가 어느덧 자라서 그 또래의 나처럼 친밀한 떡볶이의 세계에 입문한다는 게 반가웠다. 이후 아이는 종종 친구들과 어울려 컵볶이를 사먹는다. 새로운 분식집이 생기면 친구들과 몰려가서 단골 분식집의 떡볶이 맛과 비교하곤 한다. 입가에 떡볶이 국물을 묻히고 집에 오는 아이는 늘 기분이 좋다. 훗날 어른이 되어 낯설고 복잡한 세계를 살아갈 때, 언제든 원할 때마다 친밀하고 안전한 세상으로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