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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nam Kang Oct 29. 2020

미안하지만 저녁은 먹지 않겠어요

일-가정 양립을 위한 직장맘의 퇴근 전략


     

“저녁 먹으러 가자”

“드시고 오세요. 전 좀 더 있다가 퇴근할게요”

“좀 쉬었다 하지. 배고플 거 아냐”

“괜찮아요”     


마감 인생을 살았던 나의 퇴근은 세 종류였다. ① (마감 끝나면) 칼퇴근 ② (마감 중엔) 심야퇴근, 그리고 ③ 어중간한 퇴근. 저녁 6시 넘어서까지 해야 할 일이 있지만 밤 9시 전에는 퇴근할 수 있는 ③의 날마다 저녁 7시 무렵 선배들과 이런 말을 주고받곤 했다.      


밥 먹자는 사람에게 먹지 않겠다고 하는 건 한두 번은 몰라도 매번은 미안한 일이다. ‘꼰대와는 절대로 밥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한 밀레니얼 세대 후배들은 어느새 다 사라지고, 자고로 밥이란 다 같이 먹는 것이라 여기는 386 세대만 남아 있는 사무실. 낀세대의 나라도 함께 어울려드리는 게 도리라고 압박을 느끼면서도 열에 여덟, 아홉은 거절했다.

      

직장문화가 많이 달라져서 요즘엔 저녁밥 먹는데 길어야 1시간을 들인다. "딱 밥만 먹고 오자"며 40분 내에 사무실로 복귀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엔 2시간도 우스웠다. 고기 좀 구울까? 하며 삼겹살집에 가면 소주를 시켰고, 소주 한 병은 두 병이 되고 두 병은 세 병이 됐다. 혹은 매운 찌개로 속을 덥혔으니 달달한 커피 한 잔 하자며 커피숍으로 옮겨갔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동료끼리 친해지고, 처세를 익히고, 사내 정보도 얻는다. 나도 이런 자리를 좋아했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삼겹살이 소주를 부르면 곤란하니까



끼니 때 맞춰 밥을 먹지 않는 건 ‘직장맘’이어서였다. 내일부터 이틀간 심야퇴근 예정이라면 오늘이라도 아이들 잠들 기 전에 집에 가야 하니까. 그리고 또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직장 다니는 딸 대신 손주들을 돌봐주시는 친정엄마를 퇴근시켜드려야 했다.      


집과 회사는 대중교통으로 1시간 거리였다. 저녁 6시 퇴근 기준으로 2시간을 추가 근무하는데 저녁 먹느라 2시간을 쓰면 집에는 밤 11시에 도착한다(6+2+2+1=11). 밥 시간을 1시간으로 줄여도 밤 10시에 귀가한다(6+1+2+1=10). 역시 아이들이 잘 때 집에 들어가게 된다(아이들은 밤 10시를 전후해 잠든다). 그러면 친정엄마는 우리 집으로 아이들 데려와 양치시키고 같이 누워 재우다가 내가 집에 도착하면 다시 일어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도보 5분 거리라도 피곤한 일이다.   

   

저녁을 먹지 않으면 귀가 시간은 9시로 당겨진다(6+2+1=9). 친정엄마의 수고를 한결 덜어 들일 수 있다. 아이들과도 1시간가량 놀아주고 잠자리에 같이 누울 수 있다. 회사에서 집까지 차를 운전해 가더라도 교통체증 때문에 1시간이 걸리는데, 숱한 시뮬레이션 결과 신기하게도 밤 9시에 회사를 출발하면 집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아 30분을 벌게 된다(6+2+0.5=8.5). 칼퇴하는 사람들은 이미 집에 도착했고 야근/회식하는 사람들은 아직 출발하지 않아 생긴 틈새 현상이라는 게 나의 추론이다.

      

저녁밥을 먹지 않기로 한 것은 이런 계산 결과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료들을 서운하게 한 적도 있고, 조직에 대한 헌신을 의심 받은 적도 있다. 되게 후진적이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저녁밥은 집에 와서 대충 때웠다. 작은 아이가 아기인 시절엔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어 싱크대에 선 채로 맥주 한 캔 들이키는 것으로 식사를 끝낸 적도 있다. 졸려서 보채는 아이 때문에 옷도 못 갈아입은 채로 아이를 재우기도 했다. 친정엄마는 밥 안 먹고 퇴근할 땐 밥 차려놓게 미리 전화하라고 하셨지만, 언제부턴가 내 밥은 신경 쓰지 마시라고 했다. 내 뒤치다꺼리까지 지우는 게 너무 면목 없어서다.      


돌이켜보면 애면글면한 날들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하면서도 회사에도 아이들에게도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어중간한 퇴근 시간만큼 나 자신의 위치도 어중간하다고 느꼈다. 야근이 너무나 일상적인 사회 분위기를 탓하고, 저녁 이후의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도 꺼릴 게 없는 (보통) 남자들을 부러워하고, 퇴근해서 온 날 보고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미안해했다. 엄마 말대로 교사가 됐더라면 적어도 퇴근 시간 때문에 속 끓이는 일 없었을 텐데, 후회도 했다.      




호의였다는 걸 잘 알지만


[pixabay]

하지만 저녁밥을 희생해서 얻는 것도 있었다. 특히 외갓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우리 집까지 걸어가는 고작 몇 분간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가 좋았다. 어둑한 골목길에서 아이들은 오늘 있었던 재밌었던 일을 얘기해주고,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줬다. 합기도에서 피구 게임을 했고, 급식 메뉴로 스파게티에 구슬 아이스크림이 나왔고, 오늘 놀이터에서 누구랑 놀았는지 등등 아이들이 어떤 하루를 보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주로 이 시간에 알게 됐다.


날씨 좋은 밤에는 동네 과일가게나 빵집에 들렀다가 집에 갔다. 아이들과 나들이하는 기분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거실 불을 켤 때마다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함께 우리만의 공간으로 돌아왔음에 안도했다. 애들 재우고나서 혼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보자며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결국 아이들 살 냄새를 맡으며 아이들보다 먼저 잠들어버리는 그 순간이 좋았다.   

  

직장 생활에서 저녁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고, 기혼이든 싱글이든 각자 일 외의 중요한 인생이 있는 거니까. 점심도 되도록 각자 알아서, 팀워크를 위한 가끔의 회식만 오케이.


하지만 매번 저녁밥 먹자고 말해준 동료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밥상을 공유하자는 제안은 적의(敵意)가 없다는 증거니까. 호의에 호의로 응하지 못한 건 그대가 싫어서가 아니라 시간에 쫓기는 직장맘 처지 때문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던 건 잘한 일이었을까, 요즘 종종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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