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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nam Kang Nov 06. 2020

번듯한 취미, 그게 뭐라고

퇴근 지하철에서 '자기계발성 취미'에 힘써야 했다는 어떤 강박에 대해

리정혁이 윤세리를 지키고자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총을 탕탕 쏘았을 때('사랑의 불시착'),

술에 취한 정금자와 윤희재가 사무소 테이블에 꼭 붙어 누워 잠들었을 때('하이에나'),

남자친구 조에 의해 서점 지하실의 유리상자 안에 갇힌 벡이 간신히 유리상자를 탈출하지만 곧 새로운 절망과 마주했을 때('너의 모든 것'),

그리고 셀레스트가 법정에서 자신의 힘으로 시어머니 메리 루이즈의 위선을 마침내 까발렸을 때('빅 리틀 라이즈')


나는 지하철에 있었다.


퇴근해 지하철로 집에 가는 1시간은 주로 넷플릭스, 가끔은 왓챠로 드라마 한 편 감상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넷플릭스 앱을 열어 드라마를 재생시키는 순간, 나는 회사를 떠나 북한으로, 초라한 변호사 사무실 '충'으로, 뉴욕 서점의 지하실로, 거센 파도라 몰아치는 캘리포니아 몬터레이로 순간 이동하곤 했다. 퇴근길에 볼 드라마를 미리 다운로드 받아놓는 게 성가셔서 휴대전화 요금도 데이터 무제한으로 바꿨다. 새 에피소드가 주말에 업로드되더라도 꾹 참았다가 월요일 퇴근길에 시청했다. 월요병을 이기고 출근한 내게 주는 작은 포상인 셈 치고.


그러고는 잠들기 전엔 후회했다. 나도 번듯한 취미를 갖고 싶은데, 고작 드라마만 보다니.





누구는 소설가, 누구는 유튜버가 되는데


[pixabay]


내가 생각하는 번듯한 취미란 이런 거다.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밝힐 수 있고, 

일과 결부시켜 커리어 도약의 발판이 되며,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건강 증진에 이바지할 것. 


내 친구 및 지인 중에는 퇴근 후 일본어를 공부해 일본으로 발령 받는데 성공한 이도 있고, 퇴근 후 꾸준하게 소설을 쓰다가 정말 전업 소설가가 된 이도 있고, 자기 관심사로 유튜브를 시작해 수만 명 구독자를 보유한 이도 있다. 우리 남편만 해도 출퇴근 길에 '영어 원서만 읽는다'는 작은 다짐을 꾸준하게 실천해 나이 마흔 넘어서도 토익 만점을 받아왔다. 우리 언니는 동네 스포츠센터에서 10년 넘게 꾸준하게 댄스를 해서, 프로급으로 잘 추는 사람만 설 수 있다는 맨 앞 줄 멤버가 된 지 오래다. 하물며 큰 아이 준이도 <만화 삼국지>를 수십 번 읽어 삼국지 에피소드에 정통한 어린이가 됐다. 8살 은수도 한국프로야구 선수 및 성적, 순위, 야구 규칙 등에 대해 정통한 야구팬이다.


번듯한 취미를 갖기 위해 노력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한 때는 죽기 전에 고전 문학 작품을 모두 읽어야겠다고 맘 먹고 퇴근길 교보문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코너에서 한 권 고르고, 다 읽고난 뒤 다시 가서 한 권 고르는 게 취미였다. <안나 카레니나>, <백년의 고독> 등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도 좋았고, <콜레라 시대의 사랑>, <위대한 개츠비> 등 처음 읽는 책도 좋았다. 


유창한 영어 회화 실력을 함양하자며 미국드라마를 열심히 보기도 했다. 주로 <섹스앤더시티>를 어둠의 경로로 다운로드 받아서 자막 있는 버전, 자막 없는 버전으로 번갈아보고, 오디오만 듣기도 했다. 그랬더니 영어 듣는 귀가 뚫리는 듯 싶었는데, 알고보니 캐리 브래드쇼가 하는 말만 잘 이해하는 거여서 낙담했었지. 


주말 취미로는 등산을 열심히 다녔다.


입사 초에 회사에서 단체로 북한산에 오른 적이 있는데, 백운대 직전인 깔딱고개에서 눈물콧물 흘릴 정도로 힘들어하는 내 체력이 여간 못마땅했다. 회사 선배들과 술 마시다가 몇몇이 술김에 '지리산 종주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했고, 지리산 종주에 앞서 실력을 키운다며 한달에 한번씩 북한산에 올랐다. 나는 금세 산 타는 체력과 실력이 일취월장해 '북한산 날다람쥐'라는 별명을 얻었고, 산악모임 내 지위는 부대장으로 올라섰다.




고전 읽기 대신 육아 정보 검색하기


[pixabay]


문학 작품을 읽고, 미드로 영어 공부를 하며, 주말에 등산하는 나의 취미를 '직장맘'이 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됐다. 산악모임을 함께 했던 한 선배는 "부대장 출산으로 산악대가 해체됐다"고 농담 섞어 아쉬워하곤 했다. 직장맘이어도 퇴근 지하철 타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여서 책을 읽거나 영어 공부하는 게 가능했지만, 물리적 시간이 아닌 정신적 여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다, 취미에 쓸 수 있는 지하철의 시간도 사라졌다. 왜냐면 육아 정보나 아이 성장 단계에 맞는 장난감, 책, 주말에 아이와 놀러가면 좋을 곳 등을 인터넷으로 차분히 찾아보기에는 퇴근길 지하철이 가장 유용했기 때문이다.


직장맘이 되기 전에는 독서모임도 한두 개 참여했지만 그마저도 그만뒀다. 아이가 둘이 됐을 때 역시 아이가 둘인 여자 후배가 자신이 호스트를 맡고 있는 독서모임에 들어오라고 열심히 제안해준 적이 있다. 그 후배의 열성에 감탄하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하면서도 후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 진짜 먹고 죽을라고 해도 시간적 여유도, 정신적 여유도 없다. 고맙지만 그만 좀 제안해! 나 못해!"


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꽤 자란 이후 약간의 시간 여유가 생겼다. 저녁만 먹여놓으면 아이들끼리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알아서 노는데다 취침 시간도 밤 11시로 늦어지면서, 내가 밤 9시에 집에 도착해도 대신 아이들을 돌봐주는 친정 부모님에게 덜 미안하게 됐다. 책을 읽거나, 블록으로 만들기를 하거나, 골목에서 또래와 뛰어노는 등 아이들도 나름의 일상이 생겨 오매불망 엄마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흠. 이제 정말 뭔가 번듯한 취미를 가질 수 있게 됐어!

두 아이를 4살 터울로 낳는 바람에 근 10년이 소요된 '유아 육아기'를 버텨낸 나를 칭찬하며, 이제 어떤 번듯한 취미를 가져볼까 고민했다. 커리어를 확 뒤집어 엎거나, 뭔가 강렬하게 갈망하는 것이 딱히 없었기에 어쩌면 소박한 '번듯한 취미' 후보는 다음과 같았다. 


1)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는 차원에서 '1일 1인스타그램' 하기

2) 평생의 숙원, 영어공부 재도전

3) 좋은 책 골라 읽으며 서평 쓰기

4) 운동하기 


1일 1인스타그램은 개시하고 얼마 안 돼 포기했다. 왜냐면 기록할 만큼 특별하거나 의미 있는 일이 매일 일어나지 않았다. (주로 평일에는) 기억에 남는 일이란 주로 욕나오는 것들인데,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인스타그램에는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좋았던 순간만 저장해놓고 싶었다. 좀 힘들다 싶을 때마다 옛 피드를 들춰보며 '그래, 이때 이래서 좋았지' 하며 기운 좀 얻게. 그러다보니 주로 평화롭게 홀로 커피 마시는 사진으로만 채워졌다. 출근길 커피, 오후에 땡땡이 치고 마시는 커피, 퇴근길 커피, 그리고 주말 커피. 


영어공부에는 회의가 들었다. 2016년 여름, 남편 일 때문에 회사를 휴직하고 1년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지내게 됐다. 출국을 앞두고 만난 선배는 먼저 외국 생활을 해본 경험을 되살려(영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이었다) "뭘 해도 좋지만 영어공부만 하지 말라"고 조언해줬다. 이유인즉, "네가 영어를 잘 할 거면 이미 잘 하고 있을 거다"라고. 맞네, 맞는 말이네. 괜히 해도 안 되는 것에 시간과 노력 들였다가 실패할 필요 없겠네. (하지만 지금도 영어에 관해서 포기하지 않는 하나는, 영어로도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이다. 이건 정말 조만간 도전해보고 싶다.)


책은 어느 정도는 읽었다. 서평 기사를 모든 기자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운영해서, 서평을 쓰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었다. 서평 기사 마감이 목요일이므로, 금요일 퇴근할 때 신간더미에서 흥미가 생기는 책 몇 권을 골라 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중 한 권을 집중적으로 읽고 목요일에 서평을 썼다. 이렇게 최근 읽은 책 중에서 몇 권 추천하자면 '배움의 발견'(타라 웨스트오버), '20 vs 80의 사회'(리처드 리브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자서전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에밀 졸라 단편집 '결혼, 죽음' 등을 꼽을 수 있겠다. 하지만 신간 가는 대로 읽다보니 뭔가 '줄기'가 없다고 느꼈다. 소설, 에세이, 사회과학, 경제 분야가 중구난방이라 쌓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만약 부동산 투자 서적만 한달에 두세 권 읽는다면, 2년 정도면 전문지식을 전문가만큼 쌓을 수 있었을 텐데...


운동은 코로나 때문에 망했다. 동네 스포츠센터에 등록해 한참 필라테스와 줌바, 프리댄스 G/X 수업에 재미가 들렸다. 필라테스는 사무실에서 일하느라 구부정해진 몸을 개운하게 펼쳐주는 느낌을 주었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줌바나 프리댄스는 비록 내 몸에서 나오는 게 '오징어 춤'이라 하더라도 땀과 흥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해줬다. 코로나가 끝나면 운동은 다시 시작해야겠다. 




취미까지 아등바등해야 하나


산책 중 우연히 마주친 맘에 드는 사진과 친구에 대한 정의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직장맘이어서 번듯한 취미가 없다는 건 핑계일 뿐일까?


좀더 부지런하고 보다 적극적이라면 일과 육아, 살림에 더해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밝힐 만한 취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에이미 코니 배럿은 자녀가 한둘도 아니고 7명이나 되지만 판사와 로스쿨 교수 등을 거쳐 미국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배럿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 정도만 노력했다면 자기계발성 취미 하나쯤 가질 수 있었을텐데 하는 후회가 든다. 드라마는 아무리 열심히 봐도 내가 드라마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뭐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다. 


회사에서 남들에 뒤지지 않게 열심히 그리고 잘 일했다고 자부하고, 엄마로서도 크게 부족하지 않게 아이들을 돌봐왔는데, 여기서 뭘 더 해야 했을까. 왜 자꾸 더 나은 무언가가 되려고 아등바등하나. 마흔 이후에는 더 얻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이미 가진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며 잘 가꿔나가야 하지 않나. <아무튼, 외국어>는 각종 외국어를 초급 수준으로만 공부하는, 어느 직장인의 외국어 사랑 에세이다.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야근과 야근 혹은 야근과 회식이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날, 불 꺼진 방으로 늦게 퇴근하게 되는 그런 날이면 이따금 의미 없이 독일어 숫자 1에서 10까지, "아인츠, 츠바이, 드라이..."를 한번 읊어보고 잠이 든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 독일어를 잘하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뜬금없는 질척거림, 모르는 말에 대한 쓸데없는 동경이 때때로 한국어로 가득 찬 지루한 일상의 마라톤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 - <아무튼, 외국어>, 조지영, 위고


이 문장들을 읽고 생각했다. 결국엔 죄책감만 들고 마는 '번듯한 취미 찾기'를 그만두고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작은 취미를 찾아보자고.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외국어 공부 취미로 책까지 냈으니, 어쩌면 이야말로 번듯한 취미, 자기계발성 취미일 수 있으나 처음부터 작정하고 외국어 공부에 대한 책을 쓰자고 그러한 취미를 가진 것은 아니니까.  


이제부터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취미를 만들려고 한다. 부동산 척척박사가 되려고 하지 않고, 호기심 드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책을 골라 읽고, 한 잔이라도 더 맛있는 커피를 찾아 마시려고 한다. 코로나 시대의 운동은 '산책'으로 갈음하되 이왕이면 가보지 않은 곳으로 걸어다니려고 한다. 좋은 드라마도 열심히 찾아보려 한다. 경쟁이 치열한 드라마산업에 얼마나 많은 천재와 영감이 모여있는데, 그걸 못 본 척 할 순 없지. 이렇게 사는 게 '잉여' 아닐까 하는 불안과 의심이 언뜻언뜻 들지만,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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