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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nam Kang Nov 12. 2020

카푸치노가 있냐고 묻지 마세요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한 고집' 커피숍, 나인스 스트리트 에스프레소 

드디어 내게도 ‘커피 친구’가 생겼다. 

    

뉴욕 커피를 도장 깨러 다니는 건 아이들이 등교한 날 오전으로, 보통은 혼자 다닌다. 뉴욕에 친구가 거의 없다시피 하거니와, 그나마 있는 몇몇 친구도 평일엔 다들 출근하기 때문이다. 정말 나만 '뉴욕의 백수'인 것은 복인 건지 벌인 건지;;    


워낙에 혼자서 잘 노는 성격이고, 또 커피란 조용히 마실 때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에, 혼자란 사실이 그다지 슬프진 않다. 하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 커피, 특히 뉴욕 커피에 대해 잘 아는 친구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나는 커피를 마실 줄만 알지, 커피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거의 없고, 뉴욕 커피의 세계에 대해서도 주로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고 있다. 뉴욕 커피의 소소한 얘기를 들려주고, '이 커피 맛있다, 좋다'란 생각을 보다 다양하고 전문적인 표현으로 설명해주는 친구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 싶었다. 


이런 와중에 리디북스 서점을 뒤적거리다(뉴욕에서는 책을 주로 e북으로 읽는다) 홍우향이라는 바리스타이자 파티쉐가 쓴 책 <원더시티! 뉴욕 최고의 카페를 찾아>를 발견했다. 뉴욕에서 몇 년간 살았던 저자는 서울에서 자신의 카페를 내기 전 시장조사 차원에서 뉴욕을 방문해 커피숍 및 베이커리를 둘러봤다. 이 책은 그 탐험의 기록이다. 2012년 출간됐으니 벌써 8년 전 뉴욕 얘기지만,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그 8년을 버텨내고 더 번창한 커피숍이라면 꼭 가봐야 할 곳이다 싶어 당장 책을 사서 읽었다.


<원더시티! 뉴욕 최고의 카페를 찾아>, 홍우향, 소풍


책에는 내가 처음 들어본 곳, 이미 가본 곳, 가보려고 꼽아놨지만 아직 못 가본 곳 등이 섞여 있다(더는 영업하지 않는 곳도 몇몇 있다). 그 중에서 나인스 스트리트 에스프레소(Ninth Street Espresso, 이하 나인스 스트리트)를 이 친구, <원더시티>와 함께 가는 첫 커피숍으로 정했다. 첼시마켓 내에 입점한 이 커피숍은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는데,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아직까지 영업을 중단한 상태여서 가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두 매장은 얼마전 정상 영업을 개시했기에, 이 참에 처음으로 이스트 빌리지란 동네로 가보기로 했다. 


 


'Velvety'를 가르쳐준 인생 카푸치노




이스트 빌리지. 월가가 속한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바로 윗 동네로, 1960년대 히피들이 모여 살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 곳으로 정평 난 지역이다. 술집도 많고 뮤럴(벽화)이 많은 동네라고 하더니, 과연 간밤에 막 달렸는지(?) 길 앞에 쓰레기를 잔뜩 쌓아놓은 문 닫은 술집과 '쎈' 분위기의 뮤럴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뉴욕은 어디든 거지가 많은데,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각의 이스트 빌리지에는 특히나 많은 것 같았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게, 왜이리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큰 몸짓을 휘두르며 길을 배회하는 분들이 많은지, 좀 무서웠다. ㅠㅠ 최근 치러진 46대 미 대통령 선거 여파로 폭력 시위가 벌어질 것에 대비해 맨해튼 곳곳에는 경찰 펜스가 설치됐는데, 그 경찰 펜스에 정성껏 그림을 그려놓은 모습도 이스트 사이드에서 처음 봤다.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마음으로 9번 스트리트와 C애비뉴 교차로에 있는 나인스 스트리트의 첫 매장에 도착했다. 카페 앞에는 간이 벤치가 놓여 있고, 대여섯 명의 손님이 거기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뉴요커(어느 백인 아저씨)를 처음 봤다. 뉴요커들은 보통 벤티 사이즈 아이스 라테를 선호한다는 게 그간의 인상이었는데. 한 아시안계 청년은 일회용 컵이 아닌 커피잔에 담긴 카푸치노를 마시며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요즘 보기 드문 아날로그적인 광경이라 한참 그 청년을 훔쳐봤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 줄을 서서 메뉴판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아메리카노가 없잖아!


<원더시티>에 따르면 나인스 에스프레소는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가 특히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서 아메리카노, 그리고 10번 스트리트에 있는 두 번째 매장에서 카푸치노를 마셔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메뉴판에 적힌 커피 메뉴는 딱 4개 뿐이다. 뜨거운 커피, 차가운 커피,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위드 밀크. 


"저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은데요, '뜨거운 커피'가 아메리카노인가요?"

"아뇨. 뜨거운 커피는 브루잉해놓은 커피고요, 아메리카노 원하시면 에스프레소를 내려서 만들어 드려요."


휴, 그런 거였군. 


<원더시티>는 이 집 아메리카노에 대해 "서울과 뉴욕에서 마셔본 아메리카노 중 가장 맛있다"고 썼다. 아메리카노가 너무 진해서 심장이 멎을 것 같다고도 표현했다. 하지만 내게 쥐어진 아메리카노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묵직하게 진한 편이긴 하지만, 심장이 멎기는 커녕 잠이 깨는 수준도 아니었다. 서울과 뉴욕에서 마셔본 아메리카노 중 내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브루클린 로스팅 컴퍼니였다. <원더시티>가 첼시마켓에 방문했던 시기의 나인스 스트리트는 달리스 브로스(Dallis Bros.)의 원두를 사용했지만, 현재는 첼시마켓에서 직접 커피 원두를 로스팅하고 있다. 그 차이 때문인가 궁금해하며 최고는 아니지만 꽤 괜찮은 아메리카노를 홀짝홀짝 마셨다.




이왕 이스트 빌리지까지 온 거, 계획한 미션은 모두 마치자는 생각에 두번째 나인스 스트리트의 매장, 10번 스트리트와 B애비뉴가 교차하는 톰킨스 스퀘어 파크점으로 옮겨갔다. 


이 매장까지 섭렵하기로 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이 매장에선 미술 작품을 전시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A4용지보다 작은 사이즈의 그림을 벽면에 걸어놓고 판매가격도 제시해놓는 것으로 보아 지역 작가를 돕는 프로젝트로 보였다. 이날은 'Things from first floor'란 제목으로 Yuri Tayshete라는 일본계 작가의 유화 작품이 전시됐다. 과일, 케이크, 커피, 홍차, 쿠키 등 보기만 해도 기분이 달콤해지는 밝은 색의 그림들이어서 한참을 구경했다. 


자, 이번엔 "카푸치노 돼죠?" 하고 물었다. "Absolutely"라는 대답과 함께 왠지 독일 대학의 철학과 교수님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짧은 머리의 백인 언니가 카푸치노를 만들어줬다. 


와... 이건 정말 '인생 카푸치노'였다. 우유 맛만 강하고 커피는 약한 카푸치노를 싫어하는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 진한 커피의 맛이 충분했다. 그리고 우유! 예전부터 커피를 묘사할 때 벨베티 크레마, 벨베티 텍스쳐, 벨베티 라테 등 벨베티(Velvety)란 단어가 자주 쓰이는 것을 보고 그 정확한 의미가 궁금했다. '벨벳 같은', '아주 부드러운'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벨베티를 <원더시티>는 '실키(Sily)를 넘어선 것. 우유 거품 안에 공기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차지고 부드러우며, 생크림 질감인데 구름처럼 가벼운 상태'라고 설명한다. 나인스 스트리트의 카푸치노 우유가 그랬다. 훅 불어도 날아가지 않을 것 같은 차치고 부드러운 우유였고, 생크림 같지만 생크림보다는 가벼운 느낌이었다. 


아메리카노를 마셔보고 조금 서운했던 마음은 싹 날아갔다. 이래서 나인스 스트리트가 뉴욕에서 큰 사랑을 받는 것이구나, 싶었다.



커피는 맛있어야 하고, 주문은 심플해야 한다


www.symmetry50.com 에 실린 켄 나이 사진.

나인스 스트리트는 뉴욕에서 나고 자란 켄 나이(Kenneth Nye)가 2001년 설립한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이다. 본래 그는 이스트 빌리지에서 바를 운영하는 바텐더였다. 2000년을 전후해 미 서부의 커피 도시, 그러니까 시애틀과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등을 다녀보면서 '곧 뉴욕에도 스페셜티 커피를 찾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판단해 술집을 접고 커피업계로 뛰어들었다. 


블루보틀, 인텔리젠시아 등이 성공하면서 오로지 커피에만 중점을 둔 커피숍이 이젠 흔해졌는데, 나인스 스트리트가 등장한 2001년에는 낯선 일이었나보다. 나이는 "사업 초반에 우리는 손님들에게 하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해서, 아예 'No'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을까 했다"고 회상한다. 아침식사 돼요? 아니오. 하프 디카페인 있나요? 아니오. 더 뜨겁게 해줄 수 있어요? 아니오. 시럽 있어요? 아니오. 뭐,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첫 해에는 적자를 봤지만, 커피 맛이 점점 알려지면서 이듬해부터는 흑자를 내는 견실한 커피숍으로 자리매김했다. <원더시티>에는 인텔리젠시아가 나인스 스트리트에 자신의 원두를 공급하려고 공들였지만, 카운터 컬쳐(Counter Culture Coffee)라는 역시 유명한 커피 로스팅 브랜드에 밀려 매우 아쉬워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인텔리젠시아가 눈독 들일 정도로 뉴욕에서 중요한 커피숍인 것이다. 나인스 스트리트는 인텔리젠시아, 카운터 컬쳐, 달리스 브로스 등의 원두를 사용하다가 2017년경부터는 직접 로스팅하고 있다. 현재는 첼시마켓에 로스팅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스타벅스식' 메뉴판을 삭제해버린 것은 2015년경부터다. 나이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고객들이 저마다 '진짜 카푸치노란 이런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지쳐서 메뉴 이름을 삭제해버렸다"고 말했다. 카푸치노, 카페라테, 플랫화이트, 카페 코르타도 등등 우유가 들어간 커피 메뉴는 정말 다양하다. 하지만 이 메뉴의 차이를 정확히 설명해놓은 커피숍은 드물어서 손님으서는 일단 마셔봐야 무엇이 자기 입맛에 맞는지 알 수 있어 모험하는 셈 치고 주문할 수밖에 없다. 


기사 검색을 해보니 나인스 스트리트의 '초간단' 메뉴판은 첫 도입 당시 손님들에게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매일 주문하던 카페라테나 카푸치노가 메뉴에 없으니 당연히 그렇겠다 싶다. 메뉴판이 이런 줄 모르고 찾아간 나도 당황했으니까. 하지만 나인스 스트리트는 메뉴판 정책을 지금까지도 고수하고 있고, 그래도 사업이 번창하고 있는 걸 보면 손님들도 어느 정도 적응했나보다. 이곳은 자신의 메뉴판이 이처럼 단순한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커피는 맛있어야 하고, 잘 만들어져야 한다. 

손님은 혼란스럽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커피를 주문할 수 있어야 한다

(Coffee should taste good, it should be made well, 

and customers should be able to order it without confusion or shame). 


켄 나이의 라디오 인터뷰를 들었다. 진행자가 질문할 틈도 없이 속사포로 말하는 그는 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는 반복적으로 "커피는 무엇보다 맛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커피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퀄리티와 일관성(quality and consistency)"라는 말이 귀에 확 꽂혔다. 어디 커피 뿐이랴. 직장도 육아도 살림도 높은 퀄리티를 지속적으로 내는 게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얼른 코로나 사태가 끝나 첼시마켓의 나인스 스트리트 매장 문이 열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선 에스프레소 한 잔을 재빨리 마신 후 큰 사이즈의 '에스프레소 위드 밀크'를 테이크아웃 해 근처 하이라인을 걸어야겠다. 첼시마켓이든 이스트 빌리지든 조만간 다시 찾아가서 "너네는 정말 우유를 좀더 적게 넣어달라거나, 우유를 좀더 뜨겁게 해달라는 손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거야?" 하고 물어봐야겠다. 




참고자료1

참고자료2

참고자료3

참고자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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