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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Jul 14. 2022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사람입장, 동물입장, 식물입장까지도....

식물을 죽이면서 마음의 가책을 느낀 적이 있는지?      

식물도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이지만 다른 살아 있는 대상을 죽이는 것에 비해 가책이 덜한 게 분명하다. 반면에 동물을 죽이는 일은 다르게 느껴진다. 벌레나 곤충, 특히 해충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동요없이 넘어간다. 문어나 물고기와 같은 해물류의 죽임에 대해서도 무심하지만 그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고 터부시 하기도 한다. 포유류에 해당하는 소나 돼지까지도 개체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않기 때문에 수시로 식탁에 오르지만 그 아픔을 알기 힘들다. 그러나, 반려견, 반려묘에 이르면 다르다. 사람이 기르는 동물을 학대하거나 의도적으로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될뿐 아니라 법의 심판을 받기도 한다. 문명국이라는 나라에 해당할수록 더욱 그렇다.     

 

도대체 기준이 뭘까? 식물성 음식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를 비건족이라 한다. 비건족이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이유는 뭘까? 환경보호와 같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만약 동물복지 차원에서 살아있는 것을 먹지 않는 차원이라면 이해하기 힘들다. 식물도 죽여서 먹기 때문이다.     



최근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접하게 된 '이웃집 식물상담소(신혜우, 2022)를 읽고 식물 관점에서 세상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식물을 습취하면서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식물의 죽음은 죽음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감각으로는 식물을 죽음을 느끼기 힘든다. 사람들은 동물의 신경계에 고통을 안기면서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람의 고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왜 고통의 기준을 신경계에만 두는가?라면서 의문을 제기하지만 신경계의 고통만도 아닌 것 같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미생물이나 날파리, 개미같은 것도 죽을 때 신경계의 고통을 느끼고 죽을 테지만 사람은 그들의 죽임에 대해선 무감각하다(사실, 날파리나 개미의 신경계 유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죽을 때 고통을 받는 것 같아 보인다).      


작가가 말했듯이, 꺾꽂이를 사람과 식물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식물이 집을 꾸미기 위해 사람의 팔 다리를 예쁘게 자르고 머리 부분을 다듬어 꽃병에 두고 서서히 시들어가는(죽어가는) 사람을 즐기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다 말라 비틀어지면 쓰레기 통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모든 원예품종은 인간의 입맛에 맞춰 변형한 식물들이란다. 식물원에 형형색색으로 가득한 튤립을 보면서 우리는 예쁘다며 카메라 셔터를 터트릴 것이다. 하지만 드넓은 초원에서 자라는 튤립을 목격하게 되면 제 머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축 늘어진 튤립은 괴물인 셈이다. 그래서 모든 원예품종은 식물 입장에서 보면 기괴하게 생긴 괴물인 셈이라 한다. 원예치료사는 사람을 치료하는데 도움될 지는 몰라도 대신 식물을 기형으로 만들어야 가능한 사람 입장의 얘기다. 



우리들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대부분 열대종들이라고 한다. 몬스테라, 벤자민고무나무, 산세베리아가 대표적인데 이들이 원산지에서 자라면 키도 어마하게 자라고 꽃과 열매도 맺는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 베란다에서는 그들의 꽃과 열매를 보기는 드물다. 식물입장에서 특정한 장소에 감금되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서양난으로 판매되는 난초는 사실 대부분 서양에서 온 난초가 아니란다. 우리가 서양난으로 부르는 난들은 대개 중국지역이나 동남아가 원산지인 열대 난초에 해당하는 ‘동양난’이란다. 한국의 전통난에 비해 더 크고 잘 자라지만 원산지에서 자라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다.  


잡초란 표현이 전형적으로 인간입장에서 만들어진 표현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잡초는 '그 가치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식물들'이라고 했다. 실제 우리들이 이용하는 농작물, 약용 식물, 정원 식물들 중에서는 과거에는 잡초로 분류된 식물이 많다고 한다. 이는 동물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해충, 나쁜 조류란 것도 사람 입장에서 해롭다는 의미고, 사람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이르지 못하면 (그것이 시대에 따라 다르고, 주류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지만 현재의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잡초 취급을 당한다.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달라지는 관점에 따라 언제 그 가치가 드러날지 모를 일이다.  


토종 쌀, 토종 옥수수란 표현도 말이 안된단다. 쌀은 중국에서 들어 왔고 옥수수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작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된장찌게는 그야말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토속음식일 듯 싶지만 과거에는 현재와 같은 레시피의 된장찌게는 만들 수 없었을 것 같다. 된장찌게에 들어가는 감자는 남미에서, 호박은 아메리카에서, 고추는 멕시코에서, 마늘은 중앙아시아에서, 파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베스와 같은 물고기나 황소개구리 같은 외래종이 우리의 생태계를 교란한다고 떠들썩하다. 그러나 식물의 경우는 그 영향력에 대해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 같다. 미국쑥부쟁이, 가시박, 가시상추 같은 식물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 입장에서 유해 식물로 지정되어 있다. 반면, 은행나무, 능소화, 장미, 산수유, 배롱나무, 매화, 모란, 연꽃 모두 외래종이고 우리말로 지어져 친숙하게 느껴지는 달맞이꽃, 토끼풀, 개망초, 방가지똥과 같이 친숙한 식물들도 다 외래종으로 들어와 우리 식물처럼 자리 잡았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이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식물을 죽여 섭취할 수밖에 없지만 식물을 이용하는 데 있어 인간은 인간이외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 다른 동물들도 생존하기 위해 식물을 (죽여서)먹지만 인간처럼 필요한 것 이상의 식물을 죽이거나(원예, 인테리어 목적) DNA를 바꿔 종의 근본을 건드리지 않는다. 이런 일들은 단기간에는 인류를 위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이 되어 인간에게 짐이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이 가해질수록 자연생태계는 그만큼 더 파괴된다. 인간 입장에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떤 노력이 해당 종(種)의 입장에서 행해지지 않으면 점점 더 지구는 망가져 인간에게 댓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더 성숙한 사람이라면 인간의 종(種) 입장마저도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지구 공동체의 수명이 연장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른 種의 입장은커녕, 같은 種 끼리도 상대입장을 더 헤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배자나 다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의해 무시되는 소수자의 사람(성소수자, 다문화 가정, 장애자 등)의 입장도 좀 더 헤아리며 사는게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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