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플리트와 모스타르
자다르에서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4시간쯤 내려가면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지역 최대의 도시 스플리트가 나온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다음으로 큰 도시인데 인구가 18만여 명이다. 전체 인구 400만에 수도 자그레브가 77만이라 했으니 우리나라의 서울과 부산에 비하면 인구는 1/10 정도 씩 사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스플리트는 로마 황제가 여생을 보내려고 만든 도시다.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가 은퇴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찍은 도시가 스플리트였다니 그 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도착하니 화창한 날씨가 우리를 반긴다. 이곳 겨울은 춥고 비가 많이 온다고 했는데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은 이상 기온 영향으로 춥지도 않고 비도 거의 오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우울한 일이지만 여행객에는 감사한 일이었다.
스플리트는 로마 황제가 만든 도시라 하지만 이곳도 이 지역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 -> 헝가리 왕국 -> 베네치아 공화국 ->프랑스 -> 오스트리아 ->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 지배권이 바뀐다. 이번 여행에서 의외로 알게된 것 중 하나가 이탈리아의 해상 도시 베네치아(베니스)가 아드리아해안의 실력자였다는 사실이었다. 베네치아 여행 때도 들었을텐데 그때는 이탈리아의 한 도시로만 알았던 것이다. 아드리아 해안에 접한 발칸반도의 대다수 도시들은 베네치아 왕국에 복속되었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특히 베니치아 공화국은 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풀을 함락
스플리트는 아드리아 연안에 최대의 로마 유적을 품고 있는 도시라 한다. 그 이유는 과거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로마의 실권자가 여생을 보낸 장소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생을 보낸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284년에서 305년까지 재임했는데 50년 간의 난립하던 군인황제시대를 수습하고 통일한 황제로서 세습하지 않고 스스로 은퇴했을 뿐 아니라 임기 중에 방대한 제국 통치를 위해 제국을 동서로 나눠 자신은 동쪽을 지배하고 자신의 오랜 전우이며 동료였던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서쪽을 맡겨 분할 통치했던 왕이다. 양쪽으로 나눈 뒤 다시 부제를 둬 방위를 맡겨 4명이 통치하는 사두정치를 창안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으로 제국의 쇠퇴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를 위해 기독교를 탄압하고 재정은 더욱 망가졌다는 평가를 듣는 황제다. 본인은 만년에 자신의 자리를 물려 주고 재임 중 10년간에 걸쳐 건설해 둔 이곳 스플리트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냈다고 하니, 모든 걸 누린 황제였던 것 같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해안에 접해 있었다. 동서남북 쪽에 각각 문이 나 있는 직사각형의 궁전인데 가로, 세로 모두 200미터쯤 되지만 세로가 조금 더 길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남쪽 문은 브라스 게이트로 외교 사절단을 맞이하는 통로로 쓰였다고 한다. 서쪽 문의 아이언 게이트라 불리는데 병사들이 출입하는 문이고, 동쪽 문은 실버 게이트로 하인들을 비롯해 궁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 그리고 북쪽 문은 골든 게이트로 황제가 출입하는 곳이었다.
눈부신 스플리트 해안을 뒤로 하고 먼저 해안에 접한 브라스 게이트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갔다. 궁전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지하 궁전이 나타나는데 지금은 통로 좌우로 상점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이 궁전에서 2,000여 명의 스플리트 주민들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궁전이 도시로 발전한 경우라 한다. 통로를 지나자 고대의 기둥(열주)으로 둘러 쌓인 광장이 나타났는데 성도니우스 대성당을 끼고 있고 로마 유적물의 상징이 스핑크스로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이 궁전에 12개의 스핑크스가 있었다 하나 기독교도가 지배하면서 우상숭배라 하여 10개는 파괴하고 하나는 머리가 없어진 채 세워져 있고, 열주 광장에 있는 이 스핑크스만 온전한 상태라고 했다.
성 도니우스 성당은 4세기 초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무덤 건축물로 세워졌으나 유해는 분실되었고, 이후로 당시 기독교 박해로 순교당한 성인들이 수호성인이 되어 이 성당에 모셔졌다고 한다. 성당의 이름인 성 도니우스도 기독교 박해로 참수당한 뒤 이곳 스플리트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한다. 이 성당의 종탑은 궁전 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멀리서도 눈에 띄는 상징탑이 되고 있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남성 성가대 합창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싼타 모자를 쓴 분을 포함해 네 분의 나이든 성가대원들이 육성으로 찬양하고 있었다. 황제의 알현실이란 곳인데 돔형으로 뻥 뚫려 있어 네 사람의 아카펠러 성가 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당시 건축기술로는 돔 천정을 덮을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고 한다.
궁전 내부는 미로와 같아서 어디가 어딘지 잘못하면 길을 잃을 정도다. 먼저 황제가 출입했다던 북쪽으로 나아갔다. 북쪽 문으로 나가니 높이 4.5미터 거대한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처음에 저 동상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인가보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종교 지도자로 크로아티아 말로 예배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투쟁했던 그레고리우스 닌이라 한다. 그의 발가락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이 전해져 방문객마다 만지는 바람에 동으로 만들어진 발가락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서쪽 문으로 나가니 나로드니(인민)광장이 나왔고 광장에는 노천카페와 상점들 그리고 높은 음악 소리와 관광객들로 들썩였다. 연말연시 축제 분위기가 느껴졌다. 서쪽 문에서 잠시 설명을 듣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우선 해변을 즐기기 위해 궁 밖으로 나와 걸었다. 눈부신 태양 아래 애완견과 함께 또는 자녀들과 함께 해변을 거니는 모습들이 보기 좋다. 해변에는 연말 분위기로 약간 들 떠 있다는 느낌이었다. 꽉 찬 여행 일정 속에 긴장된 마음이 잠시나마 느슨하게 해줬다. 해변을 일주하고 다시 궁전에서 못 가본 동쪽 문 실버 게이트로 이동하면서 둘러봤다.
다시 남쪽으로 이동했다. 다음 관광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5대 도시이지만 이 지역 비공식 수도라고 하는 모스타르였다. 보-헤는 국가명에서 일단 두 개 나라가 합쳐진 나라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3개의 나라가 합쳐진 복잡한 나라다. 이 나라의 수도는 우리들이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도시로 알고 있는 사라예보. 보-헤는 북과 서쪽에는 크로아티아, 동쪽에는 세르비아, 동남쪽에는 몬테네그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다. 이 나라에는 카톨릭 배경의 크로아티아인(14.3%), 정교회 성향의 세르비아(37.1%), 이슬람을 주로 믿는 보스니아인(48%)들이 뒤섞여 살고있는 나라다. 국토면적은 대한민국(남한)의 반쯤 되지만 인구는 350만(91년 430만) 밖에 안된다. 이쪽 지역 나라들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대부분 이전보다 인구가 줄어든 것이 특징이다. 2018년 기준 명목GDP는 5,951달러도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크로아티아 국토 사이에 조그만 해안이 있다. 21키로밖에 안되는데 티토 재임 시절에 할양해 줬다고 한다. 크로아티아 입장에서 보면 국토가 분단되어 있는 셈이다.
나라 이름에서 보듯 우선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두 나라가 합쳐진 것임은 알 수 있다. 15세기 오스만투르크가 점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모두 그리스 정교회 성향이 강한 민족이었지만 오스만이 점령했을 당시 보스니아인은 이슬람으로 많이 개종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투르크가 패하자 러시아는 1878년 보-헤를 오스트리아에 위임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점령에 반대하는 보-헤의 민족주의자가 보-헤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부부를 암살하면서 1차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그 이후는 알다시피 유고왕국, 유고슬라비아연방에 속해 있다가 티토 사망 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 이어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도 독립선언을 하게 되는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앞의 두 나라와는 사정이 달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카톨릭의 크로아티아, 이슬람의 보스니아 그리고 정교회의 세르비아계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는 독립을 원했지만, 연방의 다수 주요 세력으로서 남슬라비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세력만의 투표로 독립을 결정하자 이에 반발하여 보-헤 내부의 세르비아인들은 '스릅스카공화국'이라는 나라를 별도로 세우고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으면서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후 이슬람교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간 내전으로 확대되어 각 세력 간에 인종청소로까지 이어지는 등 매우 격화되자 국제사회에서 중재에 나서 1995년 12월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이슬람계-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스르프스카공화국(세르비아계 공화국)으로 이루어지는 1국가 2체제를 수립하게 되었다(두산백과 참조).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따라 이 나라에는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도 3인이고 공식 언어와 문자도 없다고 한다.
모스타르에는 12만 명쯤 사는데, 국토 전체에 사는 것에 비해 이곳에는 크로아티아인(34%), 보스니아인(35%)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고 세르비아인은 적다. 특히 내전 후 모스타르에 남아있는 세르비아인은 거의 없다고 한다. 모스타르는 네르트바 강 위를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의미로 ‘다리 파수꾼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번 관광지의 하이라이트인 스타리모스트는 오스만 지배시절에 지어진 다리로 모스타르의 상징이다.
이 지역의 역사가 더 슬픈 것은 앞에서 말한 내전은 크로아티아인와 보스니아인 대 세르비아인과의 내전이었지만, 모스타르 내전은 같은 나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살면서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와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들 간의 내전이었기에 내전 속의 내전이었기 때문이다. 스타리모스트란 다리 사이로 한쪽은 카톨릭인, 다른 한 쪽은 이슬람인들이 서로 이웃으로 함께 모여살다가 서로 죽이고 강간하고 적대하게 된 내전이다. 크로아티아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인이 보스니악(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을 몰아내기 위한 공격을 하면서 인종청소라 불리는 악행을 자행한 것이다. 한 지역에 이웃처럼 살던 사람들끼리 종교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총부리를 들이댄 것이다.
버스에 내려 가이드를 따라 맨 처음 간 곳은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평화의 종탑이었다. 평화롭지 않은 곳이었기에 모스타르에서는 더 의미 있는 상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역시 1992년 전쟁에 파괴되었다가 다시 지어졌다 한다. 이곳을 기점으로 모스타르 중심지역으로 따라 들어갔다. 빈터에 유대교 표시의 문짝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물어보니 과거에는 이곳에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다가 전쟁이 나면서 이주하게된 유대인이 살던 잔재라 했다. 또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채 폐허로 남은 건물이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좀 더 아름다운 조약돌을 따라 들어가니 수많은 가게와 노천카페 사이로 사람들이 붐비는 지역이 나타났다. 더불어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건물들과 그 사이를 예쁘게 흐르는 옥빛 강물로 우리들의 탄성을 부르게 했다. 한편으로 이런 아름다운 곳에 그렇게 슬픈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럴때 쓰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찬란한 슬픔'이라는 단어가 떠 올랐다.
붐비는 인파를 헤치고 나가는 동안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싶더니 눈앞에 드러난 스타리모스트 다리의 주춧돌, Don’t forget 93이란 문자가 들어온다. 원래 이 다리는 오스만 제국 시절에 당시 술탄의 지시로 16세기 중반 9년에 걸쳐 만들었던 다리였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는 않지만 당시로서는 길이 28미터 높이 25미터의 돌로된 다리는 아주 경이로운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다리가 1993년 인간의 탐욕으로 폭파되었다. 보스니아 전쟁 때 크로아티아계 무장 조직인 포병대의 공격을 받고 파괴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이 끝난 뒤, 이 다리를 복구하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전쟁과 관련되었던 나라는 물론 유엔개발은행이 참여하여 자금을 모으고 유네스코 주관으로 본격적으로 복구하기 시작하여 2004년에 개통하게 되었다. 원래 다리 모습을 그대로 복구하기 위해 강바닥에 떨어진 파괴된 다리를 구성했던 건축물을 하나하나 건져 올렸다고 전해진다.
다리 위에는 상의를 탈의한 이곳 사람들이 관광객들에게 뭔가 얘기를 하고 있다. 자신의 여기서 다이빙 할테니 보라고 한다. 다리 난간에 올라 위험하게 오가면서 뭔가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돈을 내면 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뛰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선뜻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청년들은 이곳을 흐르는 네레트바 강에 뛰어내리는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다리에서 다리 아래 아름다운 계곡을 배경으로 여러 컷의 사진을 남기고 다리를 건너 이슬람 마을로 이동했다. 이슬람 쪽으로 들어서자 형형색색의 불빛과 장난감 같은 도자기들이 길가를 빼곡이 채워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고 있었다. 마침 연말 분위기로 수많은 인파에 떠밀려 모로코 관광지 페스와 같은 좁은 길을 올라가니 전쟁박물관이 나왔다. 현지 가이드 말로는 연말이라 오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가보니 열려 있었다. 이곳의 슬픈 역사를 한눈에 보리라는 마음으로 꽤 높은 입장료를 지불하고 2층으로된 박물관에 들어서자 엄숙하고 음침한 분위기가 엄습해 왔다. 당시 전쟁의 모습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 몸서리치도록 전해져 왔다. 유골, 유물이 가득한 이곳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공포감의 현장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도망치듯 박물관을 빠져나와 도로 건너편에 있는 묘비 가득한 곳으로 갔다. 동일한 사망 연도가 적힌 것으로 보아 전쟁시 죽거나 한꺼번에 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득한 묘지를 보면서 다시 한번 전쟁의 참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묘지를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을 따라 가면서 스타리모스트 다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수많은 가게의 기념품들과 고풍의 건물을 구경했다. 다시 한번 스타리모스트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남기고 모스타르 여행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