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선생님, 저는 열정이 없는 것 같아요.”
20대 중반, 대학교의 진로 지도 상담 선생님과 대화를 하며 나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떤 친구들은 하나의 주제에 꽂혀 돈도 쓰고, 시간도 쓰고, 에너지도 쏟으며 무섭게 달려드는데 내게는 미친것처럼 집중하는 대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뭔가 뜨겁고 열렬하게, 내 열정을 불태울 뭔가를 찾아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산 이력을 보건대, 내게 그런 뜨거움의 대상은 없었다. 덕분에 ‘어떤 일을 할 것인가?’의 물음 앞에 막막함만 더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풀이 죽은 내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해주셨다. 너는 내가 봤을 때 꽤 열정적인 아이인데?라고.
그게 무슨 말이죠? 하는 의문의 눈빛을 보내는 내게 선생님은 내 열정의 모양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너는 수영을 배우고 싶어 3년째 아침 수영을 다니고 있고,
고등학교 때부터 독서 토론 활동을 했는데, 대학생인 지금까지도 독서든 시사든 토론 활동을 이어하고 있지 않냐고.
여행을 가기 위해 꾸준히 알바를 해 모은 돈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기 위해 꾸준히 연습해서 10km 마라톤도 뛰지 않았냐고 말이다.
누군가의 열정은 짧은 시간 불타오르는 모양이지만, 너처럼 오랜 시간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또 다른 열정의 형태라고 하셨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다소 엄격한 편이라, 이런 꾸준한 활동들을 하는 나 자신에게 큰 점수를 주지 않았다. 물론 매일 아침 일어나 운동을 하고, 목표로 한 마라톤을 완주하기도 하는 나 스스로가
좋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수영실력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니고, 마라톤 풀 코스를 뛰는 사람도 아니니 이 오랜 시간 유지하는 활동들은 내게 큰 자랑거리가 못되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나이가 든 지금, 나는 그 ‘오랜, 천천한 열정’에 기대 아주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을 종종 맛본다. 물론 짧은 순간 폭발적 성장은 어렵지만 시간을 들여 숙성된 성장을 이뤄내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다.
‘계속하면 되는구나!’, ‘절대 안 될 것 같던 것도 그냥 꾸준히 하니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순간-마음속에서 작은 환희를 느낀다.
요가 수업 시간이었다. 요가의 기본동작 중 ‘차투랑가단다아사나’라는 동작이 있다. 마치 팔굽혀 펴기와 유사한 동작인데, 팔을 굽혀 내려갈 때 바닥에 배를 대지 않고
다시 팔을 펴는 위로 올라오는 동작이다. 분명 팔굽혀 펴기와는 다르고, 상체를 앞으로 쭉 밀었다가 후방 윗 방향으로 스윙하듯(?) 올라오는 동작인데 나는 바닥으로 내려가는 동작에서 꽤 오랫동안 늘 복부가 바닥에 툭 떨어져 제대로 동작을 해내지 못했다. 원체 스태미나가 약한 몸이기도 하고, 근육량도 작은 탓에 멋진 차투랑가 동작을 하는 선생님들을 보며 ‘아, 나는 저걸 언제 할 수 있을까?’, ‘되긴 되는 되는 걸까?’ 생각하곤 했었다.
후굴이(몸을 뒤편으로 펼치고 굽혀내는 동작) 비교적 잘 되는 편이라, 제법 고난도의 후굴 동작들이 점차 모양을 갖춰갈 때 조차도, 이 차투랑가단다아사나 시에는 늘 바닥에 배를 딱 대고 다시 굽혔던 팔을 펴 배를 땅에서 떨어뜨리곤 했다. 그렇게 반 체념한 마음으로 수련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요가를 한지 약 2년 반쯤을 지나던 날, 차투랑가단다아사나 동작이 물 흐르듯 매끈하게 되는 게 아닌가. 우연인가 싶어 다시 시도해보니, 그 날도 그다음 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같은 동작을 해 낼 수 있었다. 드디어 차투랑가 단다아사나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요가를 향한 내 열정은 무념무상으로 스튜디오에 가서 오늘의 수련을 꽤 부리지 않고 하는 것, 가장 앞 줄에 매트를 깔고 정성스레 스트레칭을 한 뒤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동작을 하는 일 속에 있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뜨겁기보단 고요한 루틴
처럼 보일 테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열정의 모양과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