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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고래 Jan 10. 2024

마음의 힘을 믿는 사람

결국 숫자도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만든다.

20대 시절, 1년 동안 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병원에 상주하며 간호를 했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그리고 어느 하루, 새벽기도를 다니는 분들을 태우기 위한 타 교회 차량으로 인해 사고를 당하셨다. 엄마는 그 사고로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머물렀고, 여러 차례의 수술 끝에 깨어난 뒤로도 꽤 오랜 시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때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그저 '엄마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깨어남부터 일상으로의 회복까지 우리 가족에게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은 없었다. 아빠, 언니, 그리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엄마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뿐이었다.


우리는 역할을 정했다. 아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돈을 벌고, 언니는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하고, 주말에 병원에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휴학을 하고  병원에 남아 엄마 간병을 하기로 했다. 나 역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가족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재활이 필요한 엄마를 돌보기로 한 내 선택은 공부나 취업에 비견할 일이 아니었다.


이 선택에는 두 번째 큰 수술 후 의식이 겨우 돌아온 엄마가 '잠을 자면 안 되는 순간'에 자꾸 잠들려고 해서 실랑이를 하거나, 먹어야 하는데도 먹기를 거부하셔서 애를 먹어야 했던 순간들이 영향을 미쳤다. 살아야 하니까 잠을 참아야 하고, 회복해야 하니 먹어야 하는데 그걸 죽기살기로 거부하는 엄마. 자신이 누구인지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딸인지도 알아보지 못하시는 엄마를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엄마가 '살고 싶도록', 그리고 '다시 우리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족, 그리고 '나'라고 생각했다. 큰 사고로 몸의 일부 기능이 손상되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가 느끼는 상실감. 나는 그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딸'을 보며, 딸을 위해서라도 더 살기 위해 노력해 주시기를, 회복을 위해 애써주시기를 바랐다.


간병 초기에는 엄마의 완벽한 보호자로, 한편은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신나게 재롱떠는 딸이 되어드렸고, 한참 시간이 흘러 나를 알아보시고 엄마 스스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선명히 알게 되셨을 즈음에는 때로는 엄격한 간병인으로, 때로는 위로를 주는 딸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애썼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엄마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셨다.


병간호를 했던 1년의 시간 동안 많은 친척분들과 엄마의 친구들이 방문하셔서 '네가 엄마를 살렸다.'는

말을 자주 하고 가셨다.


한편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J야, 너는 지금 졸업이 코앞이고, 네 친구들도 모두 취업준비를 하는데 시기를 놓치지 말고 너도 취업준비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엄마 간호는 간병인을 붙이면 되는데 네가 그곳에 있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라는 말이었다.

'엄마를 살린다.'는 내 의지는 확고했지만, 사실 그런 목표라도 20대의 어린 내게 대학병원, 그리고 요양병원의 보조침대로 이어지는 그 고립의 시간들이 쉽지만은 않았다. 때문에 이 피드백은 내 마음에 꽤나 큰 불안과 상처를 주었다. '정말 효율적이지 못한 선택일까?'라는 갈등도 일었고, 한편으로는 '엄마의 삶'이 회복되는 시간을 함께 하는 일을 고작 취업 1년 늦추는 것과 비교하다니! 하는 화나는 마음도 생겨났다.


간병인과 나의 다름은, '엄마가 이런 큰 일을 당하고도, 아픔을 겪고도 끝끝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줄 수 있음에 있었다. 취업하고, 결혼도하고 아이도 낳으며 살아갈 날이 길게도 남은 어린 딸이 밟혀서라도 엄마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라는 메시지, 나는 바로 그 메시지 자체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실제로도 의사 선생님이 '회복 불가능'이라고 진단하셨던 언어 기능을 굉장히 많이 회복하셨고, 잃었던 기억을 되찾으셨다. 몸도 예전만큼 잘 쓰실 수 있을 만큼 좋아지셨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다시 사랑스럽고 현명한 나의 엄마로 돌아와 일상을 살아가고 계신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의 바탕에는 분명 '마음의 힘'이 작용했다고 나는 믿는다. '돌봐주는 1인이 있다.'라는 ‘숫자’와 ‘경제성‘에 근거한 사실이 아니라, '사랑하는 딸'이 있다는 사실이 상시키시는 '삶에 대한 이유', '회복을 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점 말이다.


요즘 일을 하다 보면, 자주 사람의 마음은 간과되고 '숫자'와 '효율'만을 말하는 순간들을 목격한다. '매출'이라는 숫자가 나올 수 있는 것 또한 결국은 '소비자의 마음'을 사서 그들이 기꺼이 한 브랜드의 제품을 선택하게 하는 꽤나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이고, 그 성과를 만드는 것 또한 ‘마음’을 가진 조직 구성원 하나하나의 노력에 기인하는 것인데 숫자'에 너무 초점을 맞추면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는 것 같다.


간병인 1과 딸 1이 같은 숫자가 아니듯, ‘효율’을 말해야 하는 영역에서도 사실 숫자 이면의 진짜 성과를 만드는 것들을 더 돌봐야 하는 게 아닐까? 요즘은 그런 회의감이 든다. 계속 더 자라 지금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가진 어른이 된다 해도 나는 숫자 그 이면에 있는 더 중요한 것을 잊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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