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레다 Apr 04. 2021

01

왜 그리는가

-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내가 존재했겠지만.

절대적인 상태에 가까운 - 그림은 내게 그런 의미다.

피와 살과 땀으로 구성된 껍데기 안을 적당히 따뜻한 영혼으로 채운다면

그의 일부는 그림으로만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일부를 향한 촉수는 지극히 예민하여

약간의 변화도 알아채고 허기와 포만을 쉴 새 없이 감각한다.


그림은 하나의 문이다.

새 한 마리 없는 공허한 들판에 우뚝 서 있는 문.

까쓸 하게 녹슬어 쥘 때마다 금속이 바스러지는 손잡이가 달린 문이다.

문을 열고 계단 없이 아래로 뚫려 있는 공간을 쉴 새 없이 오고 간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보기 위해 실컷 헤매다 다시 들판에서 눈을 뜬다.

때론 눈이 오고, 비가 내리고, 바짝 타들어갔거나 바람이 불고, 더없이 따뜻하거나 아름다운,

하지만 여전히 새 한 마리 없는 들판에 널브러진 채 눈을 뜬다.

그곳이 문 안인지 문 밖의 어딘가 인지 알 수 없으나 중요하지 않다.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손바닥에 닿은 녹슨 금속 손잡이의 느낌이 익숙하다.

잠금쇠는 예전에 부서졌다.

때문에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기 보다 그저 민다는 쪽에 가깝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가뿐하게 문을 열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들판에 널브러져 다시 눈을 뜨고 문 앞에 선다.

반복되고 있지만 모든 과정은 다르다.

그래서 열고 떨어지고 일어나기를 계속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 반복의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내가 그 과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을 여는 순간마다 지금이 그때이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산책 소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