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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Sep 08. 2021

취미: 순간과 기분이 쌓여 존재가 되는 일

#청소년인문학클래스 #단어수집



거의 고백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선생님은 3년이 넘게 발레를 배우고 있어.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발레를 배운다고 말할 때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니까 고백은 맞아. 네 앞이라서 솔직하게 다 말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거든. “저는 발레를 배워요, 1년이 조금 넘었어요.” 3년이 넘게 배웠는데도 아직도 너무 못해서 시간을 싹둑 잘라버리지. 오늘도 발레 학원에 가서 열심히 춤을 추고 왔어. 정면에도 측면에도 거울이 있어서 의도하지 않아도 춤을 추는 나를 볼 수 있지. 종이 인형처럼 펄럭이는 몸을 보면서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나의 발레 경력은 1년에서 멈출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

발레리나의 그림자

     

시간이 흘러도 시간을 더하지 않는 이유는, 눈에 띄게 늘지 않는 실력을 내놓기에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그래. 물론 잘하면 좋겠지. 나무의 뿌리처럼 힘있게 아래로 뻗어 내려가는 다리 근육과 부드러운 리본처럼 우아하고 둥글게 움직이는 팔의 모양 그리고 내 몸에 깊이 새겨진 중력을 잊고 공중에 머무르듯 점프! 그것이 내 것이라면, 상상만으로도 짜릿해. 하지만 현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 나는 발레리나가 될 수 없고 발레리나가 되고 싶지 않아. 그저 내일 아침 10시가 되면 발레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갈 거야. 스트레칭과 플랭크를 하고, 잠시 숨을 정돈하고, 바를 잡고, 척추와 어깨를 곧게 펴고, 위로 길어지는 상상을 하며 플리에를 하고, 두 다리를 힘 있고 팽팽하게 당겨 파쎄, 축을 놓치지 않고 시선을 빠르게 되돌리며 턴. 발레는 나의 취미야.      


선생님은 어른이 되어서야 취미를 갖게 되었어. 물론 그전에도 취미는 있었지.      


단어에는 무게가 있어. 지금처럼 글을 쓰고 있을 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혼자 책을 읽고 있을 때 단어들은 각자의 무게를 지니게 되지. 단어가 그릇이라고 상상하면 조금 더 쉬울까? 단어는 텅 비어 있는 그릇으로 태어나. 그 그릇을 쓰는 사람이 무게를 더하는 거야. 자신의 경험 생각 의도 같은 재료들로 만든 요리를 채우는 거지. 사람마다 겪은 일도 가치관도 목적도 서로 다르니까 같은 단어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무게가 다르겠지? 그런데 이 취미라는 단어는 조금 특이해. 특기라는 단어와 같이 다니거든. 사람마다 ’취미‘의 무게는 다 다르지만, 대부분 사람의 ‘취미’는 ‘특기’보다 가벼워.     


자기소개 목록에는 취미와 특기가 있지. 선생님은 학교에 다닐 때,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할 때, 새로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취미와 특기를 밝혀야 했고 그때마다 취미는 푸대접을 받았어. ‘특기와 취미’였으면 나았을까? 맛있는 반찬은 아껴 두고 다른 반찬을 재빠르게 먹는 것처럼 취미 칸에는 얼른, 책 읽기나 영화 감상을 채워 두고 나에게는 어떤 재능이 있을까 어떤 재능이 있음을 보여줘야 할까 생각했던 것 같아. 약간의 망설임은 있어도 깊은 고민은 없는 단어, 그게 바로 내가 가지고 있던 취미였어. 그런데 발레를 하면서 취미의 무게가 자꾸만 무거워지더니 지금은 특기와 비슷해.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까? 미래는 확신할 수 없지만 취미가 특기보다 무거워질 것 같아. 취미가 있는 하루의 끝에 서 있으면 잘 살았다, 하는 느낌이 밀려오거든. ‘뿌듯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것 같고, ‘충만하다’는 말은 어떨까? 취미가 주는 충만함 덕분에 나는 내가 참 좋아졌어.      


선생님은 평생을 잘하고 싶은 사람으로 살았어. 공부도 잘하고 싶고, 글도 잘 쓰고 싶고, 얼굴도 예쁘고 싶고 그래서 칭찬도 사랑도 많이 받고 싶었지. 칭찬도 사랑도 남이 주는 거니까, 늘 지금 나는 저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했던 것 같아. 다른 사람의 눈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거지. 그런데 발레를 할 때는 단 한 번도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그 커다란 거울을 눈앞에 두고도 말이야. 그냥 나의 몸을 나무라고 상상하는 기분이 좋아서, 땀을 잔뜩 흘리고 한결 부드러워진 근육의 느낌이 좋아서 정말 열심히 하게 돼. 최선을 다하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이 어긋나고 이상한 기분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아니. 만약 내가 발레에 소질이 있었다면 어떤 마음으로 춤을 추었을까?      


취미와 특기의 다른 점이 뭐라고 생각해? 먼저 국어사전에서 뜻을 찾아보자. 취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야. 나의 감정이 중요해. 즐거운 기분이 취미를 결정 짓지. 이 일의 끝은 계속 좋아하거나 아니면 안 좋아하는 거야. 전공도 아니고 직업도 아니야. 반면 특기는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술이나 기능’이야. 나의 감정만으로는 생길 수 없어. 특별하려면 먼저 구별을 하고 비교와 경쟁을 통해서 차이를 두어야 하거든. 남보다 잘해야 잘한다고 말할 수 있잖아. 그래서 이 일의 끝은 인정을 받는 거야. 주변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공모전에서 상을 타거나 대학에 합격하거나 직장에 자리를 갖는 거지. 목적을 향하고 결과를 만들어. 이렇게 쓰고 보니 혹시 특기는 나쁘고 취미는 좋은 단어라고 생각할까 봐 조금 걱정이 되네. 목적을 확실히 정하고 결과물을 잘 만들기 위한 비교와 경쟁은 건강한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어. 다만 불이 쉽게 붙는 감정이니까 잘 다루어야 해. 자칫하면 너의 에너지와 다른 감정들까지 활활 타버릴 수 있거든.

 

선생님의 경험과 사전적인 정의를 꼼꼼하게 살펴보니, 두 단어의 가장 큰 차이는 ‘나’와 ‘시간’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기는 우리의 미래를 향하지. 어떤 아이의 특기가 달리기라면, ‘나는 우리 학교에서 달리기를 가장 잘해. 열심히 연습해서 육상 대회에 나갈 거야.’ 다짐할 수 있겠지. 반면 취미는 나의 현재에 집중해. 어떤 아이의 취미가 달리기라면, ‘나는 달릴 때 기분이 정말 좋아. 빠르게 달리다 보면 내 몸이 가벼워져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떠올릴 수 있을 거야. 달리기를 취미로 가진 아이는 달릴 때의 자유로운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지 못하겠지만, 그 순간과 기분이 하나둘 쌓여 자유로운 존재가 되겠지. 능력의 향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취미의 순간과 기분으로 우리는 존재가 될 수 있어.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존재가 될 수 있다니, 말이 조금 이상하다 그렇지? 하지만 너도 일상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있을 거야. 종일 스마트폰과 SNS로 시간을 보내고 났을 때의 감정과 조금 귀찮더라고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의 감정은 아주 다르지.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땀을 흠뻑 흘리고 났을 때의 감정은 또 다를 거야. 우리 흔히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말하잖아.      


그냥 태어났으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주체로서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은 분명 다르지. 이쯤에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을 소개할게. 선생님은 에리히 프롬이 좋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 안에 가능성을 알아보게 되거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말이야. 프롬은 행복이라는 열매가 저기에 이미 맺혀 있고 그 열매가 저절로 내 손에 떨어지거나 내가 그 열매를 따러 나무 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행복은 내가 행복하겠다 결정하고 만들어가는 거야. 그렇다면 만들어가는 방법, 기술이 필요하겠지. 프롬은 기술이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야.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도 있지. 행복과 행복의 기술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선생님은 힘이 생기더라. 모든 기술은 실패를 품고 있잖아. 시도와 실패를 충분히 반복해야 조금씩 익숙해지고 능숙해지지. 그러니까 내가 행복하겠다 결정하고 행동한다면, 지금 당장은 실패해도 괜찮아. 반복하다 보면 능숙해지고 기술이 될 거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해지고 있는 중이니, 그만두지만 않으면 돼.      


프롬이 말하는 기술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가 도와줄 거야. 프롬은 소유의 방식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어. 소유하는 삶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곧 자아가 되는 거야. 비싼 자동차를 가진 나, 예쁜 옷을 가진 나, 새로 나온 가방을 가진 나. 물건뿐만이 아니라 지식, 사랑, 희망까지도 소유하려고 하지. 전교 1등 자리를 가진 나, 아름다운 애인을 가진 나, 대기업에 취직한 아들을 가진 나. 소유가 쌓여 만든 자아는 다채롭게 변화하거나 성장하기 어려워. 그 자아 안에는 이 사회가 이미 만들어 두고 가져가라고 자극한 ‘무엇’만 있지. 그리고 같은 자리에 다른 무엇이 대체 될 뿐이야.      


반면 존재하는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해. 세계는 나에게 말을 걸고, 나는 세계에 응답하거든. 지금 여기에서 생각이나 행동을 하고, 그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이렇게 말하니까 조금 어렵지? 프롬은 다양한 일상적 경험을 예로 들어서 소유하는 삶과 존재하는 삶을 비교했어. 그중에서 너에게 가장 익숙할 것 같은 경험, ‘독서’를 두고 살펴보자.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줄거리와 결말은 중요해. 그 소설의 내용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이야기를 소유하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과 행동을 했는지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을 알게 되고 나의 삶 속에서 그 본성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생각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방식으로 책을 읽은 거야. 소유하는 삶이 책에 ‘대답’만 한다면 존재하는 삶은 책과 ‘대화’를 하지. 시험을 위한 필독서를 읽을 때와 사랑하는 작가의 신간을 읽을 때를 떠올려 봐. 능동적으로 경험하고 결과를 생산하는 것, 프롬은 인간이 존재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인간다워진다고 했어. 그리고 나는 존재하는 삶은 풍요로운 취미 생활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해.              


강경수, <춤을 출 거예요>, 그림책공작소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그림책이 있어.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 – 취미로 존재가 되어 가는 한 사람이 있거든. 강경수의 <춤을 출 거예요> 는 제목 그대로 춤을 추는 사람의 이야기야. 주인공이 춤을 추는 공간은 집으로 숲으로 강 위로 빗속으로 폭풍 속으로 쉬지 않고 바뀌지. 다양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사실 공간은 중요하지 않아. 주인공에게는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해. 눈을 감고 미소 짓는 표정이 증명하고 있잖아. 그 표정은, 나의 감각과 감정에 집중하며 나만의 춤으로 가득 채우는 충만한 시간이지. 다른 사람의 평가와 시선에서 벗어나겠다는 온화하지만 단호한 다짐이기도 하고.         


선생님은 이 책이 가득한 객석과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무대로 끝나지 않아서 참 좋아. 대부분의 이야기는 결말이 있잖아. 이야기가 시작되면 위기와 절정을 지나 열매를 맺지. 하지만 계속 전개 중인 이야기도 있거든. 열매는 없을지 몰라도 끝나지 않아. 취미를 닮은 이야기. 이 책도 그래. 절정이 와야 할 자리에 ‘그러다 보면’이라는 전개의 단어가 있거든. 빛나는 무대가 있긴 있는데, ‘그러다 보면’과 그다음 장면 ‘지금은 춤을 출 거예요.’ 사이에 접힌 면을 펼쳐야 볼 수 있어. 접힌 면을 펼치면 책 크기에 두 배가 되는 커다란 무대가 아주 멋져. 하지만 나는 이 커다란 무대는 ‘강조’가 아니라 ‘숨김’이라는 생각을 했어. 굳이 펼치지 않는다면 보지 않아도 되는 장면이니까. 선생님은 이 책에서 빛나는 무대 위에 서거나, 서지 못하더라도 춤을 추고 있다면 이미 충분하다는 취미의 마음을 읽었어.      


혹시 너는 눈치챘을까? 이 글을 시작할 때 ‘나의 취미’를 소개하고 ‘취미를 갖게 되었어’라고 썼거든. 프롬은 소유를 추구하는 사회는 명사를 많이 사용하고 동사는 점점 줄어든다고 했어. 언어에서도 소유하는 ‘무엇’에만 집중하는 현상이 드러난다는 거지. 선생님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정말 습관처럼 취미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쓰고 있더라. 취미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지. 내가 주체가 되어 지금과 여기를 채우는 움직임이야.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취미가 주는 충만함이 쌓여 나라는 존재가 될 테니까. 오늘은 너의 몇 시간을 취미의 마음으로 한껏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 행복하겠다 결정하고 그쪽으로 걷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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