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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Dec 01. 2022

정성을 들여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것

사라 스테파니니 쓰고 그린 <마르그리트의 공원>

창문을 보고 있어요. 이렇게 첫 문장을 쓰고서 다시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다가, 나는 또 ‘창문을 보고 있다’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했구나, 알아차렸어요. 제가 쓴 글을 모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창문이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죠. 제가 집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창문을 마주한 식탁이거든요. 식탁에 앉아서 창문을 보며 밥알을 오래 씹다가, 맞은편에 있는 s와 d에게 말을 건네고,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s와 d를 보고 있어도, 글을 쓰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시야는 늘 창문의 풍경을 품고 있어요.    

   

이 집에서 살겠다 마음먹은 이유는 순전히 창문의 풍경 때문이에요. 제가 사는 집은 아파트이고 아파트 단지 맨 끝에 있는 동이에요. 바로 옆에 학교가 있는데, 아파트 단지와 학교 사이 경계를 짓는 나무들이 있어요.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아파트 – 나무 – 학교. 이렇게 줄을 선 모습일 거예요. 나무의 키보다 작은 층에 살고 있으니 창문 밖이 온통 나무들이죠. 이 집으로 이사를 결심했던 순간의 나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된 나무가 되어 가고, 오래된 나무답게 점점 풍성해지고 있어요.      


처음에는 전세를 살다가, 집주인이 집을 판다는 소식을 듣고서 고민도 없이 집을 사겠다 나섰어요. 이 집을 누가 먼저 채갈까 봐 두근두근한 심정이었죠. 현실은, 경기도 끄트머리에 인기 없는 지역이고 오래된 아파트라서 그냥 두어도 팔리지 않았을 거예요.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쓰던 날, 집주인은 기분이 좋아 보였어요. 앓던 이가 빠진 듯한 표정으로 허허 웃으며 이 집에서 부자 되어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라고 덕담을 건네더라고요. 저도 기분이 몹시 좋았는데, 한 개 값으로 두 개를 산 것 같았거든요.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내고 집과 풍경을 가졌어요. 포근한 나의 집과 다정한 나의 풍경. 솔직히 말해서 요즘은 주변에 있는 새 아파트들이 부러워요. 낡은 아파트를 벗어나서 이사를 가고 싶은데, 발목을 잡는 두 개 중 하나가 저 나무들이에요. 언젠가 이사를 간다면 그 집 역시 창문 바깥에 나무들이 있어야 해요. 나무보다 키가 커도 안 되고요.         



나무가 좋아요. 나무의 모든 것이 좋아요. 나무에는 땅을 딛고 선 삶의 방식과, 나이테라는 시간의 형태, 계절을 반복하고 견디는 단단한 일상성, 아무도 모르게 매일 자라는 무심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있죠. 색깔도 여럿이에요. 여린 연둣빛과 강인한 초록과 화려하게 물든 붉은색 그리고 바싹 마른 낙엽도 좋아요. 좋아하는 마음에 비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어서 책도 많이 사두었어요. 언젠가 그리고 반드시 나무를 알아보고 나무의 이름을 부르고 나무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무가 많아 사랑하는 ‘장소’가 또 있어요. 평소라면 공간이든 장소든 크게 의식을 안 하고 썼을 테지만 이 글에서는 공간 대신 장소라는 단어를 쓰려고 해요.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는 <장소와 장소상실>이라는 책을 통해서 공간과 장소를 구분했죠. 제가 아주 좋아하는 문장이라서 자주 인용했는데, 다시 한번 읽어 볼게요.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 장소의 이름은 ‘비밀의 장소’ 예요. d와 제가 고심해서 붙인 이름이죠. 기분이 좋을 때, 기분이 나쁠 때,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때 가는 곳. 거의 대부분 우리 둘이서만 있을 수 있어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 소리로 가득 채우거나 아니면 완전한 침묵으로 채울 수도 있어요. 아, 침묵은 완전하지 못해요.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서만 있을 수 있다는 말도 틀렸네요.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딱따구리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 높은음을 내는 새와 낮게 우는 풀벌레가 있거든요. 인적이 드문 공원이에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작아서 잊힌 건지 모르겠지만 다른 공원들에 비해 관리가 덜 된 느낌인데,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쓰러진 나무는 계절이 바뀌도록 그 자리 그대로 있고 그러다가 버섯을 이불처럼 덮죠. 이름 모를 풀들이 끝을 모르고 자라다가 서로 얽혀 버려요.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색 파도처럼 한몸으로 쏴쏴 움직여요. 불규칙이 규칙인 곳. 그래서 공원이라기 보다 작고 깊은 숲. 우리는, 우리의, 비밀의 장소를 사랑해요.      


이쯤에서 d와 저처럼, 한 장소를 같이 사랑하는 어린이와 어른이 나오는 그림책을 소개할게요.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10도, 완전한 겨울이에요. 이런 겨울에는 붕어빵의 온기와 연둣빛 계절의 기운이 필요하죠. 처음부터 끝까지 초록이 가득한 배경이지만 그래서 겨울에 더 잘 어울리는 책, 사라 스테파니니가 쓰고 그린 <마르그리트의 공원>입니다.      



마르그리트는 혼자서 공원에 가요. 그곳에서 나무와 나뭇잎을 바라보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만져요. 산책 나온 사람들의 발소리와 개와 개 주인의 비슷한 얼굴은 마르그리트의 기쁨이에요.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가 기다리고 있죠. 아니 엄마가 마르그리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더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엄마는 마르그리트가 전해 주는 공원의 풍경을 듣고 또 듣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그리트는 공원에서 흙을 퍼다가 다락방을 채우기 시작해요. 다락방 바닥이 온통 흙으로 뒤덮이자 흙 속에 씨앗을 심죠. 새싹은 나무로 자라고 울창한 숲이 되어 번져 가요. 마르그리트의 집은 숲이 되었어요. 이제 엄마는 공원으로 가지 않아도 공원이 된 집에서 나무와 나뭇잎, 보드라운 바람결, 사람들의 발소리, 그리고 개와 개 주인의 얼굴을 볼 수 있지요.



이 사랑스러운 그림책은 작가가 친구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해요. 한 아이가 작은 양동이에 흙을 담아서 다락방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대요. 엄마 아빠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집을 팔 때가 되어서야 온통 흙으로 채워진 다락방을 보게 되었죠. 조금만 더 늦게 집을 팔았더라면, 다락방은 스테파니니의 상상대로 숲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저의 짐작이지만 거의 확실한 사실일 텐데, 그 아이는 나무를 사랑했을 거예요. 집을 사랑하는 것으로 채우고 싶어 흙을 퍼왔을 거고요. 양동이에 흙을 담고 다락방에 흙을 쏟아 두며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사랑하는 것. 그래서 정성을 들여 오래 바라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우리는 저마다 자기만의 풍경을 가지고 삽니다. 나만의 장소가 있어요. 못 알아보거나 떠올리지 않을 뿐이에요. 이 겨울에는 장소를 찾아 곁에 두는 건 어떨까요. 이 세계가 별다른 의미 없는 ‘공간’이 되지 않도록 나의 삶을 나의 장소 위에 짓는 거예요.


나무를 사랑해서 정성을 들여 오래 보고 싶어요. 마르그리트처럼 방을 흙으로 채우지는 못하겠지만, 대신 나무가 있는 풍경을 가졌죠. 내가 세운 나의 장소들. 오늘은 너무 추워서 비밀의 장소에 가지 못할 것 같아요. 대신 창문이 있어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집 안을 채우고 있어요. 마르그리트의 흙처럼 햇빛이 차곡차곡 쌓여 따뜻한 집.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따라 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려요.      


사랑하는 것 그래서 정성을 들여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것을 가진 사람. 그것으로 공간을 채우고 장소를 짓는 삶,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그렇게 살 수 있어서 저는 제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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