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는 동그란 사람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동그랗게 살이 찐 얼굴이지요. 얼굴만큼 배도 통통한데, 이게 다 그 볼록한 배 덕분이에요. 겨우 대여섯 살이었던 d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씩씩하게 산을 오를 수 있었던 건요. 물론 쉽지는 않았어요. d는 자꾸만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리고 지루하다고 심통을 부렸거든요.
-아빠 배가 왜 저렇게 통통한지 알아? 그건 바로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야.
-이야기?
-응, 아빠는 이야기 보따리를 꿀꺽 삼켰어. 그래서 배가 나온 거야. 네가 씩씩하게 혼자 힘으로 걸어가면 아빠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줄 거야.
s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보았고, d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s를 보았어요. s는 전형적인 이과생이고 이야기에는 도통 소질이 없지만 괜찮아요. 볼록한 배가 있으니까요. s도 모르게 s 안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술술 나왔어요. 콩쥐와 팥쥐, 오누이와 호랑이, 흥부와 놀부. 그러다가 콩쥐가 흥부를 만나 서로 친구가 되기도 하고 호랑이가 팥쥐와 편을 먹고 오누이를 쫓기도 했죠.
d는 콩쥐가 불쌍하고 호랑이가 무섭고 놀부가 괘씸해서, 팥쥐가 벌을 받고 오누이가 무사하고 흥부가 부자가 되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끝이 궁금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걸었어요. 이야기의 힘으로 산을 오르는 작고 작았던 d.
이란의 작가 나히드 카제미가 쓰고 그린 책 <셰에라자드>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이에요. <셰에라자드>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s는 이야기를 하고 d는 이야기를 들었죠. 그리고 우리는 같이 산을 넘어요. 이 경험과 기억은 어쩌면 은유일지도 모르겠어요. 이야기의 힘에 대한 은유.
<셰에라자드>의 주인공 셰에라자드는 이야기를 사랑해요. 그래서 어디에서나 이야기를 기다리죠.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고, 가만히 귀 기울이고, 곰곰이 생각하고, 다정하게 말하고, 홀로 남아 써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싶었거든요. 이야기는 사람의 삶을 담았고 사랑의 시작은 이해에 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요. ‘이해’는 명사이지만 그 안에는 움직임이 들어있답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언제나 나의 바깥을 향해요. 내가 아니라 너를 이해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거예요. 내가 있는 이곳을 벗어나 네가 있는 저곳으로 가닿으려는 움직임. 이해를 같은 뜻의 동사로 바꾼다면 바로 ‘되다’가 아닐까요. 나는 너를 이해한다. 나는 네가 되어 보겠다.
어느 날 셰에라자드는 혼자 앉아 있는 아이를 보게 됩니다. 아이의 슬픈 얼굴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죠. 아이의 곁에 앉아요. 그다음에는 귀 기울여 듣는 거예요. 아이는 오랫동안 살던 곳에서 떠나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아이가 살던 도시의 왕이 가족을 잃었고 외로움과 분노에 휩쓸려 화를 내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거든요. 셰에라자드는 고향을 잃은 아이의 슬픔을 이해해요. 이해한다는 건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슬픔 안에 있으면 누구라도 벗어나고 싶겠죠. 셰에라자드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아이의 슬픔이 사라지는 거예요. 셰에라자드는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요.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셰에라자드는 왕을 찾아가요. 그 아이, 아이가 사는 도시, 그 도시의 왕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만들고 들려주지요. 왕은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화를 내고 슬퍼하고 울고 웃어요. 매일매일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듣던 왕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 앞에 서죠. 그동안 선포했던 악한 법들을 모두 없던 일로 하겠다고 선언해요. 그리고 셰에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셰에라자드, 고맙다. 네 덕분에 나는 알게 됐어. 비록 우리 가족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이 나라의 다른 가족들은 내가 예전에 그랬듯이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말이야.” 셰에라자드는 매일매일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인데, 어떻게 왕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걸까요?
이야기의 힘으로 산을 오른 d. d가 겪은 이 경험은 이야기의 쓸모에 대한 은유예요.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는 산 그러니까 어려움이나 고난을 넘길 수 있죠. 이야기의 힘으로 도시를 구한 셰에라자드. 그럴듯하게 꾸민 이 허구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쓸모에 대한 은유가 아니에요.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는 정말 도시와 나라를 구할 수 있거든요.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문학적 상상력이 공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어요. 사람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학 특히 소설이 필요하다고 했죠. 누스바움은 이런 생각을 그의 책 <시적 정의>에 담았어요. 1994년 시카고 대학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과목을 맡아서 법학과 학생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이 책의 배경이 되었다고 해요. 법과 문학이 나란히 연결되다니 조금 어색한가요? 법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죠. 반면 문학은 상상과 감정의 결과물이고요. 하지만 누스바움은 이 오래된 이분법에서 문제점을 찾아요. 상상력을 합리적인 이성의 반대편에 세운 결과, 법과 사회 정책이 상상력에서 멀어지면서 혐오와 차별로부터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죠. 상상력을 합리적인 이성의 토대로 둘 때 비로소 타자의 삶을 상상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만든 법과 사회 정책이 우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말해요. 슬픔과 분노로 악법을 만들던 왕이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의 삶을 상상하고 악법을 폐지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 타자의 삶을 상상할 수 있어요. 소설에는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드러나거든요. 소설은 평균적인 노동자의 생활을 설명하지 않아요. 이름, 얼굴, 영혼, 삶의 역사, 일상을 가진 개별적인 인물이 등장하죠. 개별적인 인물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계급과 상관없이 주인공이 되고요. 이 인물에게 일어나는 특별하고 평범한 일 모두가 삶이고 그 삶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어요. 우리는 개별적인 인물의 구체적인 삶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감정이입은 이해로 이어집니다. 셰에라자드가 왕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는 도시의 사람들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단 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을 거예요. 이름과 생김새 가치관과 꿈 그리고 이 도시에서 차곡차곡 쌓아 온 삶의 역사와 무게가 묘사되었겠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겪어야 하는 여러 일들과 슬픔이 드러났을 거예요. 그 사람은 단순히 도시의 시민이 아니라 행복해야만 하는 구체적인 삶으로 왕에게 다가갔을 테고요. 왕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더 나아가 도시의 법을 바꿀 수 있었던 힘은 이야기의 힘이고,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는 셰에라자드의 힘이죠.
누스바움은 타자에 감정이입하는 문학적 상상력은 타자를 배려하는 도덕적 감정의 기초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 도덕적 감정을 토대로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그 존재 자체로서 존엄하다’는 진실의 싹을 틔울 수 있죠. 문학적 상상력은 곧 ‘공상’이에요. 공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던가요? 셰에라자드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고, 가만히 귀 기울이고, 곰곰이 생각하고, 다정하게 말하고, 홀로 남아 쓰면 돼요. 이 세상에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고 이야기도 끝이 없죠. 그러니 우리 이제 이야기를 나누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