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루 종일 잔소리를 한다. 우리 집에서 잔소리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 대상이 아빠일 때도 있고 남편일 때도 있다. 두 사람에게 잔소리해서라도 꼭 먹이는 것들이 있다. 주로 건강식품이다. 비타민 같은 것들. 엄마가 죽고 다른 가족들을 또 잃을까 봐 두려움에서 시작된 행동이다. 두 사람이 알아서 잘 챙겨 먹으면 좋겠지만 한 번씩 확인하면 제대로 안 먹은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봉지마다 숫자를 써놓았었다.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까먹거나 귀찮아서 안 먹었다고 할 때마다 떽떽거리고 징징거리며 정신을 쏙 빼놓아야 한다. 한동안은 잘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편에겐 가끔 속 터지면 사랑의 맴매를 하기도 한다.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는 정도지만)
"우리 엄마도 나한테 안 그랬는데 너는 왜 그래."
비타민 먹을 때마다 "나 오늘 먹었어. 화내지 마." 알약을 손에 덜어 먹기 전에 확인시켜준다. 그래, 우리 남편 착하지 우쭈쭈
아침은 안 먹으니 패스. 그 외에 하루 끼니의 99.9%는 고기. 아빠와 남편은 아마도 전생에 육식동물이었던 것 같다.
소 / 돼지 / 닭 / 오리 × 간장 양념 / 빨간 양념
무슨 공식처럼 점심 저녁 종류 다른 육류를 요구한다. 대단한 식습관이다. 만드는 입장에서는준비하긴 편하다. 맨날 같은 양념에 고기만 바꿔서 재거나 굽거나 하면 되니까. 밑반찬에 김치가 있어 야채를 충분히 먹고 있는 셈이라는데 나로서는 황당하다. 고기 해서 내놓으면 두 사람은 경쟁이라도 하듯 공격적인 젓가락질을 선보인다. 그놈의 고기에만. 정작 나는 맨날 맡는 고기 냄새에 질려 백김치에 물이나 조금만 밥을 먹고 있다(나는 고기든 야채든 김 치든 간에 간이 세거나 빨간 양념 든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가다가는 두 사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질 것 같아 샐러드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고기 굽는 건 편한데 샐러드는 오히려 야채 여러 가지를 다듬어 소분해야 한다. 물리지 않게 소스도 다양하게 구비해야 하길래 번거로워 그냥 완제를 일주일에 한 번씩 주문한다. 열 박스 주문해서 그 주에 몽땅 소비를 한다 다섯 박스는 내가 운동 끝나고 먹고 나머지 다섯 박스를 두 사람 입에 넣는 게 새로운 미션이다. 남편은 그래도 수월하다. 먹으라고 차려놓으면 맛있게 먹긴 먹는다. 야채+고기 일 때 얘기다.
"이상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밥상이 조촐하지?"
샐러드 양이 적지 않지만 남편은 풀떼기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분명히 집에 들어올 때 고기 냄새가 났다며 갸우뚱하는 그를 보며 나는 기가 막혀 웃었다.
아빠는 강적이다. 아침 열한 시에 밥을 먹고 오후 네시면 배가 고플 시간이다. 나는 이때 아빠에게 간식을 준비해준다. 아빠는 수프를 참 좋아한다. 이틀에 한 번씩 끓이는 소고기 수프. 양송이 수프 무슨 수프 많은데 다 필요 없고 소고기 플레이크가 들어간 바로 그 수프가 아빠의 최애다. 수프가 없을 때는 초코파이나 라면을 먹기 때문에 야채를 좀 챙겨보려고 샐러드를 내놨다. 한 번만 먹어보라고 사정사정하며 징징거렸다. 아빠는 정말인지 소가 여물 씹어먹는 소리를 내며 꾸역꾸역 먹더니 이런 거 다신 사지 마, 투덜투덜. 건강에 좋은 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맛도 없는 게 비싸고 배도 안 부르다며 짜증 짜증. 결국 초코파이로 입가심을 한 뒤 소고기 수프를 사러 나갔다.
나도근성이 있지. 싫다고 한다고 안 먹일 수는 없는 것이다. 샐러드 주문은 주당 다섯 박스로 줄였다. 좋아, 이건 내가 먹을게. 두 사람은 다른 걸 드셔야겠네요.
나는 토마토와 딸기를 산더미처럼 주문했다. 하루에 먹을 만큼 내가 싹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 주겠어. 낮에는 피곤 가시라고 딸기 열다섯 알에 아로니아 한국자를 얼음이랑 같이 갈아 슬러시를 만들어먹였다. 저녁에는 칼로리를 생각해서 토마토에 매실청을 넣어 갈았다. 믹서기 돌리고 씻고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지만 두 사람이 쭉쭉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배가 부르달까.
<고기로 도배된> 식탁에서 실컷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만사가 귀찮아도 슬러시를 마시고 있다. 배불러 죽겠는데 뭘 또 먹으라고 하냐며 투덜거리긴 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두 사람 모르게 끼니때마다 음식의 양을 줄여서 차리기 시작했다. 살짝 부족할 정도로 말이다. 두 사람 다 부족을 감지하면서 내게 하는 말이 웃기다.
아빠는,
"너 니 서방이라고 쟤한테 많이 주고 나는 적게 줬지."
남편은,
"아버님 더 주고 나 남은 거 준거 아닌가?"
두 사람이 고기를 너무 드시기에 야채 먹을 배를 남겨두려고 일부로 양을 좀 줄였어요. 몰랐지?ㅎㅎ
한편으로는 약간 씁쓸하기도 하다. 두 사람 고기랑 야채 먹이느라 고군분투하는 사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빵을 주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대용량으로 사면 싼데 나 빼고 다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상해서 버리게 된다. 생활비 낭비 안 하려고 내가 포기한 빵과 케이크를 생각해서라도 두 남자가 질리도록 토마토를 갈아 먹일 것이다.
"너는 너무 말이 많아" - 아빠
"부인의 잔소리는 심각해요" - 남편
엄마는 잔소리가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일거수일투족에 잔소리를 했다. 먹으라는 것도 많았고 먹지 말라는 것도 많았다. 당시에는 좀 내버려 두지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나 싶었다. 요즘엔 토마토를 갈면서 엄마 생각이 참 많이 난다. 티브이 보고 있을 때 윙- 하는 믹서기 소리가 나면 티브이 소리 하나도 안 들리는데 그거 좀 안 하면 안 되냐고 투덜거렸었다.
엄마는 달달한 주스를 맥주컵에 넘치도록 따라 주곤 했다. 다 먹어야 돼, 하면서. 꿀꺽꿀꺽 힘겹게 마시고(배부르긴 한데 솔직히 맛있으니까 다 먹고) 식탁에 컵을 탁 내려놓으면 엄마는 "맛있어?" 하고 물었다. 괜히 무안해서 "배 터질 거 같아. 왜 이렇게 많이 줬어"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때는 몰랐었다. 토마토를 갈던 엄마 마음도 몰랐었고, 끝없었던 잔소리가 사랑이었다는 것도 몰랐었다. 내가 우리 집 두 남자에게 이러고 있어 보니 다 알겠다.
엄마는 착한 마녀. 나도 착한 마녀.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다. 가슴에 사랑이 많다는 것. 그리고 그 넘치는 사랑을 표현하다 보니 마녀가 되어버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