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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꽃언니 Sep 19. 2022

제사 지내지 말까?

엄마가 죽은 지 일 년 만에 제사의 존폐를 논하다

꿈을 꿨다. 새벽녘부터 잠을 설쳤다. 요즘은 다시 밤이 길어져 새벽 다섯 시에도 어둠이 내린 기세가 한 밤중 같다.

나는 제사를 안 지냈으면 좋겠다
제사 지내면 마음이 안 좋으니까
그냥 절에 맡기는 게 어떻겠냐

추석에 제사를 지내면서 나는 또 울었다. 그간 원망도 하고 미워도 하고 그리워도 하며 온갖 말을 다 퍼부었기에 할 말을 못 해 답답한 것은 없지만 슬픔은 가슴에 있는 항아리에 한 방울씩 차오르다가 때가 되면 이렇게 한 번씩 넘치기를 반복하려나 보다. 아빠는 제사를 지내고 나면 꼭 향이 타는 동안 엄마한테 할 말 한마디씩 하라고 시키곤 한다. 엄마에게 우리가 어떤 마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부모로서 자식들이 엄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우리가 가족으로서 살아온 한 세월이 한낱 꿈처럼 부질없이 흘러간 게 아님을 서로에게 알려주는 의식 같달까. 아빠는 이번 추석 차례상 앞에서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납골당에 못 가서 미안하고, 자네가 싫은 게 아니고 가면 자꾸 생각이 나서 괴로우니 자네가 이해를 좀 하고."


납골당의 엄마 사진을 볼 때마다 자꾸만 그 사진을 찍었던 날이 떠올라서 무척 괴롭다. 우리 부부와 함께 무의도의 작은 동산과 해변가를 산책했을 때였는데 어찌나 하늘이 파란지 대부분의 날들이 뻘물에 비린내 가득한 서해 한 복판에 위치한 섬이었음에도 청량한 바닷물과 초록한 섬의 정취가 꽤 낭만적이었다. 오르막이 가파른 구간이 짧게 짧게 있어 적당히 땀이 나는 게 운동의 상쾌함이 느껴졌다. 얇은 버건디 색 스웨터를 입고 밝은 갈색의 세팅 파마를 한 엄마는 섬의 초록함과 바다의 푸르름과 어우러져 쨍하니 밝았다. 햇볕은 뺨에 살짝 있는 기미를 가렸고 원체 이목구비가 큼직한 엄마의 얼굴은 건강한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예순이 다된 엄마는 어쩜 저렇게 피부에 잔주름 하나 없는 건지 서양인 같이 뚜렷한 선을 가진 엄마 얼굴을 내가 닮아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엄마가 예쁜 게 자랑스럽고 좋았다. 그러다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면 속상했다. 엄마보다 여덟 살 연상인 아빠는 세월의 흔적이 더 뚜렷해 보였다. 특히 눈썹 위에 한 줄 진하게 있는 깊은 주름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 아빠 연배의 할아버지들 보다야 훨씬 팽팽한 피부에 옷 핏도 훌륭했지만 나이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진 속의 젊은 엄마는 죽었고 늙은 아빠는 내 곁에 있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어 주는 것을 감사해야 하겠지만 남들은 둘 다 곁에 있는데 왜 나는 그걸 누리지 못하는 것인지 지금도 어이가 없고 억울하며 분개하고 황당하다.


제사를 절에 맡기자고?
엄마가 죽은 지 일 년 밖에 안되었는데
생면부지 스님더러 제사 지내라고?
지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야?

엄마를 마주하기가 괴롭고 힘들어도 말이지, 물 한잔 떠놓고 하는 제사라도 집에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차례도 지내고 좋아하던 것도 사서 상에 올려놓고 해야 하는 게 맞다 싶은데 아빠가 제사를 없애고 싶다고 했고 동생이 그에 맞장구를 쳤으며 남편은 한마디 보탰고 올케는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아빠) 할아버지도 살아생전 불교를 믿지 않았는데 절에 모신다"


"(동생) 난 아빠가 하자는 대로 할래. 스님이 하는 게 나아. 스님은 전문적으로 비는 사람이잖아. 하루 종일 비는 게 직업인데 엄마 극락왕생은 우리가 가끔 제사 지내는 거보다 더 잘 빌어줄걸."


"(남편) 우리 엄마랑 아빠도 나중에 죽으면 어디 절에 맡겨달라고 했었어."


내가 무척 고지식한 사람이라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소신을 밝히자면 제사란 가족끼리 지내는 것이 맞고 상차림을 하며 떠나보낸 이를 그리워하는 남은 이들의 당연한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평생 가족들 밥 챙겨준 게 인생에 제일 열심히 많이 한 일이었을 엄마한테 일 년에 상 세 번 차려주는 게 여러 말할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동생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다. 내 맘 편하고자 집 근처에 가까운 절에 다녀왔다.


(엄마는 평생을 천주교를 믿어왔다. 나 역시 냉담한 지 오래되었으나 천주교에 적을 둔지 삼십 년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엄마를 구원하지 않았다. 그런 예수님의 사랑에 배신감을 느껴 천주교인으로서의 나를 부정하고자 한다)


각설하고,


요즘 세상이 많이 변해서 국가차원의 차례상 간소화 운동도 있는 것 같고 실제로 아예 없애는 집도 있는 것 같다. 나 역시도 어렸을 때 한 번도 본적 없는 증조모 증조부 제사를 지내는 것이 무척 고리타분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본가에서는 여자는 제사 지내는 게 아니라고 해서 엄마랑 나랑 고모는 항상 남자들이 절 하고 향 올릴 때 뒤꼍에 어정쩡하게 서 있곤 했었다. 새벽부터 서초동까지 내달려가는 바람에 그 잠깐 제사 지내는 시간 동안 너무 졸려서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제사가 끝나는 젓가락 딸각거리는 소리가 나면 슬금슬금 상에 놓인 깐 알밤을 한 줌 집어다가 오도독오도독 씹으며 돌아다녔다.


제사 같은 게 없었으면 좋겠다고,  연휴엔 해외여행이라도 한번 더 다녀오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 엄마의 제사 문제가 되니까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 내 자식이 태어나 나를 본다면 엄마는 옛날 사람이라며 구시렁 댈 수도 있겠다 싶다.


아빠는 자꾸만 우리 모두가 행복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각자가 추구하는 행복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지 말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각자도생 해야 한다고. 그런데 나는 엄마가 죽기 전의 행복했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예전의 나로, 나를 가장 사랑하던 나는 메말랐다. 아빠가 오늘은 기분이 어떤지 눈치를 살피고 남편의 컨디션이 괜찮은지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 인생의 소금 같은 사람이 갑자기 없어져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시시때때로 깊은 수렁에 나를 밀어 넣는다.


제사는 하던 대로 지내기로 했다. 엄마도 봐야지. 엄마가 죽었다는 것을 힘겹게 이겨내려 애쓰는 내 모습을 보면서 다른 가족들을 꼭 지켜줘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길 바라면서 나는 꼬박꼬박 엄마의 밥상을 차릴 생각이다.


행복, 행복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어렵다. 돈이나 시간을 쓴다고 행복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생명이 있는 것들을 보면 울분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 들어 난생처음 초록한 화분을 샀다. <에밀리>라고 이름도 지어주었다. 전자제품으로 꽉 찬 거실에 심지 굳게 우뚝 선 선인장 하나가 내게 말을 건다.


"괜찮아질 테니 넌 빨리 내려가서 공부해!(너의 삶을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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