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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에 핀 꽃 한송이 Nov 22. 2023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소소한 일상 에세이

사춘기 시절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의 운동화가 비싸다고 엄마가 사주지 않자 그럼 엄마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 돈을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 앞으로 받을 용돈을 모아 그 운동화를 좀 늦더라도 반드시 사려고 마음을 먹고 낡은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사이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내렸다. 엄마는 돈을 더 보태줄테니 차라리 겨울 신발을 사라며 깔깔깔 웃었지만 이제 시즌이 지난 상품이 된 그 운동화가 할인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매장에 들렀다. 내 발에 맞는 사이즈가 마침 한컬레만 남아 있었고 50%나 할인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것이 되기 위해 끝까지 남아있은 운동화였는데 정작 그 신발에 손이 닿은 순간, 냉장고에 넣어두었음에도 쉰 내를 확 풍기는 생선같은 마음을 마주하게 되였다.

마음이란 워낙 물 같은 것이라 다른 이물질과 섞이면 썩기도 하고, 온도에 따라 증발되기도 하고 얼어붙기도 하도 높낮이에 따라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도 하며, 바람과 시간에 의해서 고요하기도 하고 밀물처럼 밀려오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는 다 알지 못했다. 그저 쉰내나는 마음을 나도 어쩌지를 못해 운동화를 제자리에 조심히 내려놓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만 남았을 뿐이다.

연애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10대 시절엔 일기장에 사랑이 두렵다는 식의 글을 썼다. 사랑했다가 계절 지난 운동화를 바라보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오게 된다면 얼마나 슬플까, 운동화에 변심한 마음도 잘 추스리지 못해 일주일씩 상심에 빠졌던 나는 과연 실연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설령 헤어지지 않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분명히 운동화를 바라보던 마음이 임하지 않을까. 사람 마음이 한결같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 두렵다고 엄살을 부리던 첫 연애를 장장 4년을 하고 나서야 나는 사랑의 실체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됐다. 그리고 사랑에 면역도 생겼다. 사랑의 실체라 함은 사실 사랑도 매번 성실하지는 않아 잠깐 사랑이 외출한 텅 빈 마음으로도 둘은 익숙한듯 만나서 한가하게 음료수 한잔에 빨대 하나를 꽂고 히죽거리며 나눠 먹을 수 있다거나, 사랑이 날 아이 다루듯이 까-꿍 오늘은 상대의 마음 안에 있는 게 보여서 행복하게 웃게 하다가 다음날은 보이지 않아서 애타게 거의 울기 직전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나, 사랑은 이제 마음 안에 있지 않는 중에도 마치 있는 척 분실술로 그림자만 두고 떠나기도 한다는 것 등은 모두 사랑의 한심한 실체들이였다. 사랑은 매번 성실하거나 정교하지 않았고 듬직하지도 않았다. 위인들의 말을 빈다면 사랑 자체는 죄가 없으니, 사랑을 담는 그릇인 인간의 마음이 쉬이 변형되고 괴짜같아서 그런 것일테다.

사랑의 실체를 알지만 그래도 한쪽 눈을 감고 모르는 척 사람은 계속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삼십대에도 여전했으므로 지인 소개를 통해서든 다른 루트를 통해서든 남자들을 만나 소개팅을 했다. 부동산 중개인이라는 남자와 마주 앉아 훠궈를 먹은 날에는 그의 해박한 부동산 지식에 눈이 동그래서 듣고 있으면서 나도 언젠가 내 명의의 집 한채를 장만해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지만 그 남자의 차에 타고 집까지 픽업을 받는 동안 남자가 나를 대략 시가 얼마의 매물로 계산하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을 받아 집 근처 전철역 앞에서 내렸다.

이것저것 다 괜찮아보이는 남자와 두 번을 데이트하면서 왜 정작 연애를 하고 싶어지지는 않을까, 이대로 흘러보내긴 아쉬운데 대체 왜 굳이 잡고 싶지는 않은지 심란한 마음으로 새벽2시에 그 남자의 SNS를 염탐했다. 그러다 손가락이 눈치없이 ‘좋아요’를 눌러버리곤 황급히 취소를 누른 뒤 네이버에 ‘좋아요’를 누르고 취소하면 상대방에게 기록이 뜨는지를 검색하느라 한시간을 할애한 날엔 아무리 나이가 서른 번 넘게 내 정신을 후려쳐도 감정 앞에선 여전히 속수무책이고 어리숙하고 경험치 습득이 잘 되지 않는 못난이같은 민낯을 마주해야 했다.

아쉬운 마음은 사랑이란 감정의 테두리 선에 겨우 간당간당하게 발 한쪽만 걸리적거리는 종류라는 확신에 그 남자를 흘러보내고 나서 새삼 20대의 연애는 애쓰지 않아도 봄이 되면 반갑게 찾아왔다가 가을쯤엔 떼 지어 날아가는 들새처럼 왔다리갔다리가 자연스러운 것이였는데 30대가 된 후의 감정은 안간힘을 써도 마음은 고인 물처럼 어딘가로 상대를 찾아 쉬이 흘러가지 않고 점점 유동성을 잃고 걸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점점 딱딱해지는 마음을 구해줄 세이버를 찾는 마음으로 여전히 물을 찾아 할딱이는 참새처럼 어느날 어떤 남자와 커피숍 테이블에 마주 앉았을 때 나는 투명한 유리그릇같은 그의 마음을 보았다. 여물을 씹는 송아지의 눈처럼 슴벅이는 남자의 작은 눈동자 속에서 나는 아담과 이브가 손 때를 묻히기 이전에 존재했던 순수무구한 지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도덕적 기준이 높아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성자의 표정이 아니라 애당초 거짓을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습득이 아예 안되는 사람처럼 앉아 첫 만남에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으며 다음주에 또 만나고 싶어한다는 마음을 너무 쉽게 다 들켜버린 남자는 또 그걸 아무렇지 않게 표현했다. 다음주에 또 볼 수 있을까요,라고.

그날 나는 집에 오면서 머리를 갸우뚱했다. 무슨 사람이 저렇게 투명하고 쉬운 마음을 갖고 있을까. 아무 여자나 마주 앉으면 저렇게 바로 애프터를 신청하는건가?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이 쉬워보일까 뜸을 들이고 최소한 다음날쯤에 또 보자는 얘길 꺼내는게 아닌가. 상대방이 가장 진지하고 소중하게 다뤄줬으면 하는 건 언제나 마음일텐데 그럴듯한 포장 하나 없이 투명한 어항 속 눈에 띄는 금붕어처럼 펄떡이는 그 남자의 감정의 무게를 나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다음 만남에도, 그 다음 만남에도 투명한 마음을 그대로 내게 노출했다. 의도된 노출이 아닌, 원래 노출하고 사는 사람이였다.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의도치 않았는데도 계속 내가 말을 걸었다.

“너도 내 마음이 다 보이지?봐, 내 마음은 이렇게 생겼어, 내 마음에 널 향한 사랑을 동전 모으듯 하나씩 모으고 있어,짤랑짤랑 사랑 동전이 모이는 소리가 들리지? 난 마음에 널 향한 집도 짓고 있어. 집 만드는 건축 재료랑 집 쌓는 속도도 보이지?”

나는 남자의 마음에 담긴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서서히 안정감을 느꼈다. 투명하다는건 정말 강한 것이라는 깨달음도 그때 얻었다. 남자의 마음은 굳이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았다. 손에 든 패를 다 보여주는 사람과 어떻게 눈치 게임을 하고 이기려고 하겠어, 무해한 사랑을 해야지.

그 남자의 마음도 불완전한 것이라서 사랑을 넘치게,흔들림없이,한결같이 담아 내게로 흘러보내지는 못했다. 다만 사랑하는 동안 나는 남자의 마음 안에 사랑이 넘치다못해 홍수가 나는 것도 보았고 어떤 날은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 아이처럼 시무룩해하는 모습도 보았다. 불완전하지만 그것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면, 사랑을 담은 그릇이 투명하다면 불안한 사랑에게 먹이도 주고 달래도 주고 가끔은 쉼을 쉬도록 한동안 지켜보기만 하면서 그렇게 긴 시간을 사랑을 육아하듯 키워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사랑은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메말라가는 모습이든 휘청거리는 모습이든 함께 목도하며 사랑의 뿌리만 뽑지 말고 식물처럼 건실하게 존재하도록 키워가야 한다는 걸 알고나서 나는 그 남자와 부부가 되었다. 불완전한 마음 안에 심어놓은 사랑이라는 식물을 함께 키우며 때에 따라 사랑의 열매도 따먹고 큰 비가 쏟아지는 날엔 가림막도 쳐주고 추운 겨울엔 앙상한 그대로를 덤덤히 견뎌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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