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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재형 딴짓마스터 Mar 31. 2017

왜 우리는 대학을 가는가

왜 우리는 교육을 받는가

학원 선생님은 방학이 되면 14교시 (혹은 그 이상의) 시간표를 적어주셨다. 수업 10시간, 자율학습 4시간이었던 것 같다. 공포의 시간표를 처음 만난 건 고1 여름방학이었다. 나도 친구들도 ‘언제까지 쓰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라봤다. 야속한 분필은 멈추지 않았다. 탄식이 하나 둘 터지자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러냐’는 선생님의 표정. 그리고 한 마디,


자율학습? 아닙니다 타율학습입니다!


이 말을 남기고 ‘자(율학습)’라고 적은 부분을 지우시더니 ‘타’로 고치셨다. ‘타, 타, 타, 타...’ 마음속에 총알이 ‘탕!’ 박히는 기분이었다. “3년 동안 방학은 물 건너갔구나” 강남 못잖게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 산 죄였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국에 태어난 죄였구나 생각한다. 가슴속 반발심은 사치라고 묻어뒀다. 당연한 줄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고3이 가지는 무게감을 알기 때문에. 혼자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스타일이니까 강제성이 필요하다는 합리화와 함께 난 방학답지 않은 방학을 받아들였다.


수능, 대입은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큰 산이다. 우리나라의 10대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대학생 때 한 친구가 “그래도 초등학교 6년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물은 적이 있다. 영어 유치원까지 생기는 마당에 무슨... 동기들의 집중 포화가 이어졌다. 아이들은 그때도 학원에 간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한국의 아이들은 10년 이상을 수능만 바라보며 달린다.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한 레이스다. 그래야 옆 자리 경쟁자를 누르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 당연하다. 경쟁이니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X보다는 O와 친해지는 편이 유리하니까. 아이들은 경쟁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방향 교육을 받는다. 사회적으로 ‘정답’이라고 여겨지는 답을 찾아내기 위해. 수능은 정답을 맞히고 걸러내기 위한 최적의 시스템인데 일단 이 부분은 여러 번 공론화됐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아이가 스무 살이 됐을 때, 대학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그렇게 노력해서 대학에 들어갔다면, 대학에서만큼은 보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보물은 뭘까. 공기업 입사? 고시 패스? 대기업 취업? 이런 건 졸업 즈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고민이지 대학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아니다.


대학은 인생을 살며 가장 많은 자유가 부여되는 시기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과 도전이 보장되는 시기다. 그래서 대학의 보물은 ‘자유’다. 고등학생 때까지 정답을 찾기 위한 경쟁을 했다면 대학에서는 각자의 관점을 구축할 수 있는 공부를 할 때다.


우리는 스무 살이 되면서 성인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점에 선다. 한편으로 성인이 된다는 건 앞으로 닥치게 될 고민을 스스로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부모, 선생님이 갖고 있던 결정의 중심축을 자신에게 가져와야(만)하는 시기다. 그러려면 자신만의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의 스무 살은, 당신의 스무 살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 것인가’를 고민할 시기다.


관점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심병이다.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것에 대한 의심. 그것은 돌려 말하면 ‘질문’이다. 우리 모두는 어릴 적 ‘질문형 인간’이었다. 부모의 말 한마디, TV에 나온 한 장면, 우연히 펼쳐 든 그림책 한 페이지에서도 끝없는 질문을 끄집어냈다. 그랬던 우리가 학생이 되면서 ‘왜’의 가치를 잊게 됐다. 누군가가 질문을 반복하면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면 ‘프로 불편러’ 취급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똑같은 교복만큼 똑같은 사람으로 자라왔다. 학생들의 개성과 차별성은 교복 스타일 차이 정도에 불과했고 큰 범위에서 우리는 비슷한 인간이었다. 


빛나는 눈빛을 지켜줄 수 있도록..
질문형 인간으로의 회귀


대학에서 교수는 절대적 존재다. 그가 마련한 커리큘럼을 따라야 하고 시험을 보며 평가받는다. 아직도 캠퍼스는 일방적이다. 강의실에서 이뤄지는 소통은 발표 수업 정도가 일반적이다.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 간의 토론은 부족하다. 덕분에 갑작스럽게 질문형 인간으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다. 학생들이 관점을 가진 성인으로, 멋진 어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교수들의 변화도 필요하다.


한번은 모 방송국 아나운서가 전공 수업을 진행했다. 현직 방송인의 강의를 기대하고 많은 학생들이 몰렸다. 첫날부터 질문의 연속이었다. 교수님은 눈매만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누구도 그의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모든 학생들이 대답을 마치자 다른 질문이 날아들었다. 3시간 내내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질문 패턴을 파악했다 싶으면 살짝 비틀어진 질문을 던졌다. 긴장을 풀 수 없으니 수업에 몰두하게 되고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토론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전공 중에 고득점이 어렵기로 유명한 시험이 있었다. 광고 포스터의 의미나 콘텐츠의 스토리텔링을 분석하는 수업이었다. 교수님은 항상 논리적인 주장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정답과 완전히 반대되는 분석이라도 일관된 논리를 펼친다면 높은 점수를 주셨다.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기자 출신 교수님이 진행한 저널리즘 강의도 인상적이었다. 교수님은 어떤 주장과 반론이 날아와도 차분함을 유지하셨다. 1학년 교양 수업이라 수업 내용에서 벗어난 질문도 있었지만 모든 질문이 존중받았다. 교수님이 학생들의 질문을 존중하자 학생들은 적극적인 질문과 토론으로 응답했다. 다른 생각을 무작정 배척하지 않고 반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관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캠퍼스는 아직 일방적이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실험은 계속된다. 토론이 일반적인 외국 대학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외면할 게 아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언제나 과도기가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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