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평 빌라 투룸 월세집에 그랜드 피아노 들이기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은 무대공포증에도 난 피아노를 멈출 수 없었다. 5년이 넘도록 벗어날 수 없었던 우울과 공황장애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운명처럼 다시 다가온 피아노는 진창에서 천천히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설프게 건반을 누르는 굳은 손끝에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흘러 나갔고, 잔뜩 위축된 마음이 피아노로 맺은 인연들의 격려와 칭찬에 조금씩 풀어졌다. 무대에 올라 박수를 받노라면, 무채색이나 다름없던 세계에 색색깔의 빛들이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를 멈출 수 없었다. 연주 직전 무대공포증이 나를 짓눌러와도 끊임없이 공포감과 대면했다. 무대공포증은 날 고통스럽게 할지언정 피아노를 막는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빈약한 주머니 사정은 이야기가 달랐다.




홍슬희쌀롱을 시작으로 종종 무대에 오르게 되면서 연습실 사용 빈도가 늘어났다. 주 5일, 하루 4시간까지 늘어나면서 한 달 대여비만 50만 원에 달했다. 또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서 피로도 풀릴 새가 없었다. 영양제 값이 십만 원씩 나갔다. 과연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즈음 생각한 방법이 집에 있는 디지털 피아노를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었다. 난 전공생들도 쓴다는 디지털 피아노를 찾아봤다. 모델을 찾고 장단점을 비교해 보다가 어쿠스틱과 디지털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피아노 신상이 나왔다는 소식을 보았다. 가격은 800만 원대. 난 곧바로 악기사가 줄지어 있는 서초동으로 향했다. 당장 800만 원이라는 큰돈은 없지만, 피아노를 직접 쳐보고 괜찮다면 돈을 모아볼 심산이었다.


피아노 판매점에 들어가 신상 하이브리드 피아노를 쳐봤다. 확실히 집에 있는 40만 원짜리 중고 디지털 피아노와 급이 달랐다. 하지만 소리 울림 인위적이거나 빠르게 연속적으로 치는 연타에서 소리가 씹히는 등 클래식 피아노를 제대로 치기엔 부족함 투성이었다. 실제 피아노 건반의 움직임을 구현해 냈다고 했는데 세밀한 표현은 불가능했다.


난 피아노 업그레이드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일주일에 다섯 번 가던 연습실을 세 번으로 줄이고, 연습실 대여 시간도 3시간으로 줄이는 것으로 타협했다.





6월 피아노 동호회 정기 연주회가 끝난 지 2주 만에 레슨을 받으러 갔다. 이 날 레슨에선 9월 무대에서 칠 슈만 아베크 변주곡을 배웠다. 슈만의 곡은 다시 피아노를 친 지 1년이 되어 조금 풀어진 내 손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곡이었다. 교수님은 내 손 위에 당신의 손을 올려 피아노를 치기도 하시고 긴 시간을 들여 설명을 해주시기도 했다.


애정 어린 레슨 끝 무렵에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슬희야, 나 레슨용 그랜드 피아노 바꾸려고. 그래서 말인데 이 피아노 물려줄까? 열심히 하는 게 기특해서 생각났어.”


나는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나한테 피아노를 물려주신다고? 그랜드 피아노를?’


연습실이 아닌 집에서, 그것도 디지털 피아노가 아닌 그랜드 피아노로 연습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아랫집, 옆집, 건물주가 현관문을 쾅쾅 두들기며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말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한데요... 집이 좁아서 그랜드 피아노를 받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교수님은 왜인지 나보다 더 아쉬워하시는 것 같았다.




집사람은 그랜드 피아노 이야기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서 다그쳤다.


“그걸 왜 안 받아? 무조건 받아야지! 당장 전화드려.”


“우리 집 15평 빌라 투룸 월세야. 오빠가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서 그랜드 피아노 치면 소음공해로 쫓겨나.”


“방법이야 찾아보면 되지. 일단 받겠다고 해. 무조건!”




교수님 일정에 맞춰 그랜드 피아노 이사 일정은 두 달 뒤로 잡혔다. 그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일단 집에 방음재 시공을 생각해 봤지만 원상복구가 쉽지 않을 것 같았고, 집 근처 지하 월세방을 계약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방음시공을 해야 하는 건 똑같았다. 그때 집사람이 방음부스를 보여줬다.


방음부스는 두꺼운 벽을 가진 커다란 박스였다. 이미 많은 전공생들이 집 안에 설치해 사용하고 있었다. 난 곧바로 유튜브에서 방음 설치 사례들을 찾아봤다. 영상 속 방음부스는 안에서 트럼펫을 불든, 드럼을 치든, 그랜드 피아노를 치든,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이사할 땐 방음부스 업체를 불러 해체하고, 이사한 집에 가져가 다시 조립해서 쓰는 방식이었다. 벽지도 장판도 상할 일이 없다. 이거면 교수님의 그랜드 피아노를 우리 집에 들일 수 있었다.


난 곧바로 방음부스 설치 비용을 알아봤다. 새 방음부스는 설치비까지 최소 600~700만 원이 들었다. 버는 족족 동물병원비로 탕진하느라 모아둔 돈 하나 없는 내겐 두 달 안에 마련하기 어려운 비용이었다. 난 중고 매물로 눈을 돌렸다. 먼저 가장 방음이 괜찮았던 업체를 정하고, 부스를 설치할 방과 피아노 크기, 예산에 맞춰 세 가지 조건을 세웠다.


- 박스 안에 박스가 들어가 있는 이중 구조일 것

- 외관 박스 크기는 가로 3m, 세로 2.5m를 넘지 말 것

- 설치비 포함 최대 300만 원 이내일 것


난 조건에 맞춰 온라인 중고 거래 어플을 뒤졌다. 매물은 많이 올라와 있었지만 좀처럼 조건과 딱 맞는 부스는 나오지 않았다. 예산에 맞추면 그랜드 피아노 사이즈와 맞지 않고, 그랜드 피아노 사이즈에 맞추면 예산과 맞지 않았다. 일주일 가까이 매물을 찾아보던 중, 내가 골라둔 업체 홈페이지에 단돈 20만 원짜리 방음부스 거래 게시글이 올라온 걸 발견했다. 이중 구조에 내 방에 딱 맞는 크기였다. 10년이 되긴 했지만, 세부 사진을 보았을 땐 삭은 것 하나 없이 말끔했다.


업체에 연락해 부스구매 및 설치 절차와 비용을 확인했다. 이전 설치비는 158만 원.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비용은 아니었다. 중고 부스 가격만 200만 원이 넘는 시세에 부스와 설치비까지 합쳐서 178만 원이면 득템한 거나 다름없었다.


중고 방음부스를 예약한 뒤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교수님은 방법을 찾아 기뻐하시는 한편, 한 가지 우려를 내비치셨다. 그것은 바깥으로 새는 소리가 아닌 바닥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진동 소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였다.


진동을 어떻게 잡나 고민하던 중 헬스장에서 봤던 두껍고 못생긴 운동용 매트가 떠올랐다. 덩치 큰 사람들이 무거운 운동 기구를 턱턱 던져 내려도 바닥은 전혀 울리지 않았다. 난 바로 쿠팡에서 가장 두꺼운 헬스장 매트를 방음부스 사이즈에 맞춰 주문했다. 새까맣고 얼룩덜룩한 매트 생김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못생긴 헬스장 매트를 가릴 깔끔한 카페트도 골라 담았다.




방음부스가 방을 절반 넘게 차지할 예정이라 맥시멀리스트로 살고 있던 나는 물건들을 과감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 책도 반 이상 버렸고 편안히 기대앉아 책을 읽던 암체어도 갖다 버렸다. 고양이들이 타지 않아 인테리어용으로 쓰던 캣휠도 당근에 팔았다.


침대가 문제였다. 나는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자는 통에 퀸사이즈 라텍스 침대를 구매해 쓰고 있었다. 작은 사이즈로 다시 사자니 이미 부스 설치, 피아노 이전, 피아노 조율까지 앞으로 들어갈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서 싱글 사이즈로 침대를 직접 자르기로 결정했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난 바로 싱글 사이즈 매트를 올릴 3만 원 짜리 플라스틱 침대 깔판을 주문했다. 깔판이 온 뒤엔 집사람과 함께 라텍스 매트리스를 커터 칼로 슥슥 잘랐다. 이 비싼 침대를 내 손으로 자르다니. 하지만 뭐 어떤가. 무려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올 건데.




모든 준비가 끝난 뒤 방음부스가 들어오는 날이 됐다.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이어서, 해체된 부스는 기사님들의 등에 하나하나 실려 들어왔다. 사람들이 커다란 짐을 들고 들락날락하니 1층 부동산 사장님이 놀란 눈을 하고 올라왔다. 혹여나 집주인에게 안 좋은 말이 흘러 들어갈까 걱정됐다. 난 부동산 사장님께 방음부스를 왜 설치하는지 잘 설명해 드렸고 부동산 사장님은 현장을 쓱 둘러보시곤 별문제 없다며 내려가셨다.


아침에 시작한 방음부스 설치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부스를 설치해준 팀의 대장님이 방음부스 성능을 보여주시겠다면서 부스 안으로 들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꽥꽥 질러대셨다. 밖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음부스의 성능은 실로 놀라웠다.


그랜드 피아노는 방음부스 설치 한 달 뒤에나 들어왔다. 그사이 헬스장 매트와 카페트를 부스 안에 꽉 맞게 깔아두었다. 기사님 두 명이서 300kg이 넘는 피아노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물 전체에 피아노를 운반하시는 기사님들의 앓는 소리가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하나! 둘! 으어어어억!!! 하나! 둘! 허으으으으으억!!!”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출산하는 아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편이 이런 기분일까? 끙끙 거리는 신음이 집에 가까워질수록 피아노를 맞이한다는 기쁨과 죄송함이 오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시원한 얼음물이 떨어지지 않게 계속 채워놓는 것밖에 없었다.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온 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 방음부스 안을 꾸몄다. 책장에 악보와 전공 서적을 줄지어 세워 놓고, 디즈니 캐릭터 인형들을 피아노 뚜껑 위에 올렸다. 집사람이 은은한 조명도 설치해줬다.


난 집사람에게 물었다.


“나한테 피아노 꼭 받으라고 했던 날 말야. 대책도 없었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받으라고 했던 거야?”


집사람이 대답했다.


“우리 엄마 도자기하고, 아빠는 목공 하시잖아. 그래서 집안에 작업실이 있는 게 익숙해. 쮸리한테도 그런 작업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언제든 피아노 칠 수 있게 말야.”


나는 흔쾌히 집 한구석을 온전히 내게 내준 집사람이 고마웠다. 비싼 그랜드 피아노를 내게 물려주신 홍 교수님께 감사했다. 방음부스와 피아노를 옮겨주신 기사님들께도 감사했다.


그렇게 피아노를 다시 마주한 지 1년 만에 기적처럼 그랜드 피아노가 집에 들어왔다. 피아노를 그만둘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