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피아노 독주회 준비기 2편

직장인이 평일에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다. 출퇴근 시간까지 포함하면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하루 24시간 중 벌써 10시간이 날아간다. 거기에 이상적인 수면 시간 8시간을 더하면 벌써 18시간이다. 남은 6시간 안에서 식사도 챙겨 먹고, 사람도 만나고, 씻고 휴식도 해야 한다. 야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쓸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든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반년 뒤 피아노 독주회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우선 평일 최소 연습 시간을 4시간으로 잡았다. 조금 빡센가 싶었지만 입시생이나 음대생 시절에는 많으면 하루에 10시간도 쳤으니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식사 시간도 아까워서 단백질 쉐이크를 주문했다. 식사로 치기엔 부실하긴 해도 배고파서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운전하며 출근할 땐 교수님 레슨 때 녹음한 걸 크게 들으며 레슨 내용을 되짚었다. 쇼팽 발라드 3번 첫 음을 칠 땐 손가락을 바닥을 향해 꽂아 내리듯이 치지 말고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을 표현 하며 치고...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6번 오른손 왼손이 아르페지오로 서로 주고 받는 부분에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노래하듯 치고...


지하철로 출근할 때면 머릿속으로 처음부터 상상하며 쳐보는 연습을 했다. 교수님께서 전수해주신 이 꿀팁은 내가 어느 부분에서 막히는지, 어느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연습 방법이었다. 피아노 앞에서 칠 땐 멈칫하긴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가 가능했는데 상상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음악도, 손가락도 멈춰버리는 부분이 생겼다. 몇 번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도 똑같은 부분에서 머리가 새하얘지고 다음 음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면 빨리 먹을 수 있는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우고, 레슨 녹음을 들으며 악보에 적어놓은 메모들을 봤다. 상상 연습하다가 막히던 부분도 악보에 체크하고 음표가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 다시 꼼꼼히 확인했다.

온갖 서류에 뒤덮인 채 업무를 하나하나 쳐내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지칠 만도 한데 오후 5시 30분이 되면 연습실 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마음에 설레기 시작했다. 오늘은 연습을 어떻게 다르게 해볼까? 오늘 연습에선 어떤 성장이 있을까? 손과 눈은 업무를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연습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내일 뵙겠습니다!” 외치고 뛰쳐나왔다. 평소 운동이라곤 숨쉬기밖에 안 해 몇 미터도 못 가 심장이 벌렁대고 턱끝까지 숨이 찼지만, 난 연습실로 한숨에 내달렸다. 빨리 피아노에 앉아 연습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연습실에 도착하면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시원한 쉐이크를 마셨다. 맛은 드럽게 없지만 김밥 한 줄 씹어 먹을 시간조차 아까우니 별 수 있나.


난 예약한 방으로 들어가 준비하는 곡을 한 번씩 쳐보며 손을 풀었다. 그리고 각 곡마다 오늘의 연습 목표를 정했다. 의욕이 넘쳐흘러 연습 일기장은 어느새 목표로 가득 찼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목표는 원대했지만 4시간 안에 모든 목표를 이루려다 보니 어느 곡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마음만은 100% 해결을 하고 넘어가고 싶었는데 줄어드는 연습 시간에,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 싶으면 다음 목표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4시간이나 연습했지만 연습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도, 만족하지도 못했다.


밤 10시 30분이 넘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만족하지 못했던 연습을 이어갔다. 그래야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지털 피아노로는 음악표현을 세밀하게 하지 못하니 악보 외운 걸 점검하거나 손이 꼬이던 곳을 중심으로 연습했다. 그렇게 연습에 집중하다 보면 하루 종일 나만 기다렸던 고양이들이 예뻐해달라고 피아노 위로 올라오기도, 집사람이 잠 좀 자라고 얘기하러 오기도 했다. 난 몇 번의 손짓으로 고양이들과 집사람을 내보낸 뒤 밤 12시가 될 때까지 연습에 몰입했다.




연습실에 가지 않는 날, 날 힘들게 하는 건 디지털 피아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퇴근하고 오자마자 저녁은 대충 먹고 빨리 연습에 집중하고 싶은데 집사람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피아노를 오래 치려면 체력이 좋아야 한다나 뭐라나. 퇴근하면 미역국에 삼겹살에 고등어구이에 온갖 맛있는 음식들이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는 동안에도 피아노 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불안감이 차올랐다. 정성 들여 차려준 밥상에 내 속마음을 내색하진 않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집사람의 손맛이 너무 좋아 밥을 두 번 먹는 건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먹다 보면 배부른 탓에 연습에 좀처럼 깊게 집중할 수 없었고 연습 시간마저 줄어들어 짜증이 확 올라왔다. 하지만 집사람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다. 모두 내 조급함 때문이었다. 난 집사람에게 미리 골라뒀던 예쁜 드레스를 보여주며 다이어트를 시작하겠노라고 말했다. 내가 다이어트 한다고 하면 저녁을 거하게 차리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내 모든 일상은 피아노 연습 시간을 확보 하느냐, 못 하느냐가 기준이 되어 굴러갔다. 직장인이니 어쩔 방법이 없었다. 음대생 시절처럼 하루 종일 연습할 수도 없으니깐 말이다. 어쩌다 한 번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차라리 이 시간에 연습을 하면 조금 더 내 실력이 나아질 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난 친구들과 만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할 바에 아예 약속을 만들지 않아야겠단 마음을 먹었다. 대신 미리 잡아놓았던 약속에선 친구들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생활을 방치하는 게 맞는 걸까? 싶기도 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잠도 줄여서 피로는 쌓일 대로 쌓였다. 하지만 그렇게 연습에 온전히 시간을 투자한 효과가 있었는지, 다음 레슨 받으러 갔을 때 교수님이 “어머, 슬희야. 시간도 없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연습했니? 대학원 준비해도 되겠다.” 라며 대견해하셨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교수님이 말씀하신 고쳐야 할 것 10개 중 8개는 해결해 갔으니 기뻐하실 만도 했지. 교수님의 칭찬은 귀에 남아 또다시 연습 동력이 됐고 피로감마저 영광의 상처처럼 여기게 됐다.




미리 봐뒀던 와인바에 전체 대관이 가능한지, 대관비는 얼마인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다. 공간 전체 대관비는 한 시간에 10만 원. 리허설부터 연주, 그리고 손님들과 잠깐 인사하는 시간까지 하면 3시간은 필요하니 대관비는 30만 원이겠군. 전체 대관인데도 예상보다 낮은 가격에 공간도 둘러보지 않고 바로 대관을 결정했다. 사장님은 들뜬 나를 진정시키며 먼저 공간을 둘러보고 결정하라고 얘기하셨다. 난 바로 다음 날 방문 일정을 잡았다.


와인바는 술집이 즐비한 거리에 있는 건물 4층 끝에 있었다. 뮤지션들의 사진이 걸려있는 좁은 입구 끝에 출입문이 있었다. 뮤지션들의 포스터를 보니 보컬부터 통기타, 재즈 피아노, 클라리넷까지 장르도 다양했다. 이 뮤지션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한참을 부러워하다가 와인바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오크 향인지, 와인 향인지, 위스키 향인지 잘 모르겠지만 기분 좋은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나왔고, 문 옆엔 사진으로 봤던 갈색 그랜드피아노가 놓여있었다. 사장님은 반갑게 맞이해주시며 공간 내부를 안내해 주셨다. 영업 전이라 꺼져있던 무대조명도 켜주셨는데 살짝 어두운 객석 조명과 무대를 비추는 환한 조명을 보고 있자니 벌써 무대로 뛰쳐 올라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눈치채신 사장님은 손님이 없을 때니 피아노를 쳐봐도 된다며 무대로 나를 이끌었다. 난 갈색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마치 독주회 실전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온 집중을 다해 리스트 라 캄파넬라의 첫 종소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난 뒤이어 나오는 라 캄파넬라 테마가 끝나기도 전에 피아노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튀어나왔다. 어떤 음들은 완전히 소리가 풀려있고, 어떤 음들은 쟁쟁거리거나 뭉툭했다. 클래식 전문 홀에서 예민하게 관리된 피아노는 내가 원하는 대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동호회 정기연주회에서 쳤던 피아노도 영롱하고 반짝반짝거리는 소리가 고르게 났다. 하지만 와인바의 피아노는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이 상태의 피아노로 연주한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기껏 소리 하나하나 신경 쓰며 연습했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표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연주에 몰입할 수 없게 되고 손님들도 음악을 즐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공간을 빌리기엔 이 와인바의 분위기나 규모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단 하나. 피아노 조율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장님께 조율을 진행해달라고 하기엔 조율 결과가 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조율사 선생님을 데려오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난 사장님께 조율이 필요하다고, 비용은 내가 지불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대신 조율사 선생님은 내가 데려오고, 조율 시간은 대관에서 빠지는 조건으로. 사장님은 되레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며 흔쾌히 제안을 수락하셨다.

피아노 상태를 확인한 뒤 독주회에 올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고르기 위해 메뉴판을 둘러봤다. 메뉴판 안에 있는 음식 사진들은 손님들에게 생색까지 낼 수 있을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와인바여서 그런지 음식값이 너무 비쌌다. 티켓도 안 팔 건데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독주회를 파티처럼 열겠다는 홍슬희 아닌가? 대관비 30만 원, 조율비 20만 원 잡고...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음식과 술값으로 지출할 수 있는 돈은 70만 원이 한계였다. 난 일단 사장님께 들이댔다. 최대한 죄송한 티를 팍팍 내면서.


“손님들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데 쓸 수 있는 예산이 70만 원이 최대일 것 같은데... 제일 기본 메뉴들로 해서 35인분 정도... 맞춰주실 수 있을까요? 술은... 제일 저렴한 칵테일로요.”


사장님은 잠깐 고민하시더니 메뉴판을 내 앞에 펼치셨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메뉴를 하나하나 짚으며 말을 하셨다.


“그래도 이왕 하시는 거 잘 대접해야죠. 제가 예산 안에서 이 소시지랑, 여기 치즈랑 과일이랑 해서 준비해드릴게요. 칵테일은 만들 때 시끄러워서 연주에 방해될 수 있으니 와인으로 하고요. 와인은 하우스 와인으로 나가는 것보다 좋은 거로 준비해 볼게요. 어때요?”


사장님 뒤로 후광이 비쳤다. 내 독주회를 도우러 온 천사인가. 난 연신 감사 인사를 드렸다.

이 외에도 전체 대관이니 와인바 손님은 독주회 시간에 받지 않는 것, 피아노 조율 일정, 포스터 부착 같은 세부적인 내용도 나눴다. 사장님은 내가 제안한 것들을 모두 받아들여 주셨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독주회도 잘될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공간 대관도 마쳤겠다 미리 만들어놓은 포스터를 카톡 프로필 사진에 올렸다. 소심한 홍보였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와인바 사장님과 협의한 35개 자리에 누구를 초대할지 고민에 잠겼다. 아무나 초대하기엔 공간도 예산도 제한적이었고, 그 ‘아무나’가 내가 받고 싶던 박수를 잘 쳐줄지 가늠도 안 됐다. 난 가만히 내 인생 서사를 돌아봤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나를 축하해줄 사람들을 떠올렸다. 내 14년의 공백을 아는 사람들, 실수해도 비웃지 않을 사람들로. 대학생 때 어려운 아이들을 만나게 해준 봉사동아리 언니들은 꼭 초대하고, 강사 시절 만났던 친구도 초대하고, 코로나 전까지 함께 음악 활동 했던 제자들과 친구들도 초대해야지. 아, 뼈아픈 충고를 거침없이 날리던 대학교 친구, 회사 다니면서 만난 친구, 회사 식구들도 초대해야겠다.

초대할 사람들을 써내려 가던 중 집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쮸리, 프로필 사진으로 해놓은 홍슬희쌀롱 포스터 말야.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야. 오빠가 만들어볼게. 괜찮지?”


집사람은 미술가 집안의 첫째 아들로 디자인적 감각이 뛰어났다. 분명 내가 한 것보다 감각적으로 해줄 게 분명했다. 난 이때다 싶어 집사람에게 프로필사진용 포스터뿐만 아니라 초대장으로 쓸 포스터와 안내문, 홍슬희쌀롱 당일에 손님들이 볼 순서지를 부탁했다.


난 안내문을 준비해 집사람에게 전달했고, 집사람은 순식간에 파란색에 가까운 보라색 바탕에 노란 글씨로 홍보용 안내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박아 포스터도 만들었다. 내용은 재밌는데 디자인이 깔끔해 고급스러워 보이는 착시마저 생기는 듯했다.




지인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지인들은 14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나에게 진심을 다해 축하해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겠노라고 약속했다. 사람들의 축하에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것만으론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난 받았던 선물 중 포장조차 뜯지 않은 것들을 한군데 모았다. 그중에 핸드크림, 립밤 등 누구나 받아도 괜찮은 선물만 골라냈다. 개수가 모자랐다. 난 바로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친구는 인기가 많아 매년 생일 선물이 현관문 절반을 가릴 정도로 쌓이는 친구였다.


“나 독주회 답례품으로 쓰게 네가 받은 선물들 나한테 나눔 해줘.”


친구는 염치없을 만큼 당당한 내 부탁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흔쾌히 선물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친구가 보낸 물건들이 도착했다. 스타벅스 텀블러, 화장품, 티 세트, 향수 등등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선물들이었다. 난 아주 만족스러웠다. 내 돈을 들이지 않고 답례품을 준비하다니. 선물을 뜯어낼 생각을 한 건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대관부터 포스터와 안내문, 지인 초대와 답례품 준비까지. 홍슬희쌀롱을 할 때 필요한 건 얼추 준비가 끝났다. 그동안 식사를 간단히 했던 덕분인지 미리 사뒀던 분홍 벨벳, 검정 실크 드레스도 몸에 딱 맞았다.



이제 남은 건 연습뿐이었다. 퇴근 뒤 연습실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벼웠지만 곡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레슨을 받고 올 때면 내가 신경 쓰고 표현해야 할 부분들이 배로 늘어났다. ‘이 표현만 해내면 음악이 더 듣기 좋을 텐데’ 하는 마음에 끊임없이 연습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연습에 기복도 있었다. 어떤 날은 지금 당장 연주를 해도 될 만큼 연주가 잘 됐는데 어떤 날은 잘 되던 부분도 망가졌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 때면 교수님은 귀신같이 “슬희야, 연습은 기복이 있다? 휘둘리지 말고 꼭 중심 잡고 연습해야 해.”라며 말씀하시곤 했다. 난 교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홍슬희쌀롱이 다가올 수록 손가락 끝엔 음대생 시절처럼 굳은살이 꺼칠하게 자리 잡았다. 가만히 다른 손가락 끝으로 굳은살을 매만지고 있노라면 14년이라는 공백이 조금씩 메워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홍슬희쌀롱을 위한 마지막 레슨이 끝난 뒤 인사를 하고 나서려던 중, 교수님은 나에게 마지막 조언을 하셨다.

“슬희야, 사실 나도 연주 하면 준비한 것의 70%밖에 안 나와. 그러니까 어떤 실수를 해도 신경 쓰지 말고 꼭 즐겁게, 최선을 다해 피아노 쳐야 한다? 연주 끝나면 꼭 연락해. 잘하고 와”


아마 과장해서 말씀하셨겠지만 교수님의 말은 엄청난 위로가 됐다. 홍슬희쌀롱이 다가올수록 ‘어떻게 음악을 잘 표현해 볼까’가 아니라 ‘틀리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교수님도 이런 내 상태를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난 교수님께 최선을 다해 즐겁게 하고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홍슬희쌀롱 아침이 다가왔다.

반년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무대에서 즐길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