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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Sep 24. 2017

필요한 것을 잘 갖춘다면

사할린으로 떠나는 길에서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금요일 퇴근길로 이번 주 일과도 끝. 이듬날이면 공항으로.


짐을 싸러 집으로 곧장 향해야 하는데, 오랜만에 길상사가 그리웠다. 머릿속이 복잡한 건 아니었으나, 어딘가 임계점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전혀 없지만 어렴풋이 이번 여행길은 마지막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 그것이 자의일지 타의일지조차 구분도 가지 않지만.


삶에서 많은 일들을 겪어오니 순간순간 늘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지워버릴 수가 없다. 북한이 핵이라도 쏘는 건가, 갑자기 불의의 사고가 나는 건가, 하루아침에 여행이 싫어지는 건 아닐까. 그러나 이제 그런 옅은 불확실성과 불안함은 나를 초연하게 만든다. 이젠 어찌할 수 없는 파도와 폭풍도 다 감싸안을 수 있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데 까지는 버텨내볼까 하는 기개를 가지고.


그럴 때 청명한 가을 하늘에 적당히 선선한 바람, 그리고 우거진 녹음은 나를 견고하면서도 유연하게 만든다. 길상사 경내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욕심을 이번 역시도 빌어보는 것이다.


'이번 여행길에서도 그 모든 것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십쇼.'





여행을 알차게 준비하고자 했던 마음은 없었는데, 되돌아보니 출퇴근 지하철에서 구글로 연명하던 한 달. 생판 모르는 러시아어 한 마디 익혀보겠다고 포켓북을 가지고 다니던 세 달. 여행길에 동행이 있다는 건 나태하고 게으른 나홀로여행자의 습관조차 바꿔놓는다. 사실 그렇게 한다 해도 내가 손해볼 건 없으니.


이것만큼은 내가 동행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물이자 보답이니. 기분좋은 중압감이다. 객지에서의 모든 것을 안을 수 있는 최소한의 툴킷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동행도 그런 연유로 이 길에 함께 올랐겠지라는 가정 하에.


그렇게 토요일 새벽 5시,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새벽길을 달려 도착한 인천공항의 29번 게이트. 면세점의 위용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작은 에스컬레이터와 전광판. 해리포터에 나오던 9와 3/4번 승강장을 발견한다면 아마도 이런 기분일까. 들뜬 면세점 거리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 무리의 어르신들.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은 아마 나와 B형 밖에 없던 것이었나. 그들의 양 손은 여행가방이 아닌 삶의 가방이 쥐어져 있었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도 괜찮은 곳이려나.


이윽고 탑승시작 안내와 함께 우리는 공항 저 뒤편에 따로 먼산을 보고 있는 비행기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것이 저 뒷편에 있는 여행의 시작. 비행기도, 게이트도, 사람들도.




기내 모니터에 표시되는 항로는 여태 그렇게 가본 적도 없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도에는 엄연히 표시되어 있지만 좀처럼 그런 지역까지는 눈길을 돌려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줄곧 눈밖에 나왔던 곳으로.


그렇게 3시간 반, 곧 착륙한다는 방송.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은 마치 강릉에 고속버스를 타고 온 느낌이랄까. 비행기는 좀처럼 우리를 게이트에 내려주지 않는다. 아니, 이 곳은 게이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방을 메고 건물 안으로 향한다.


작은 카페 정도의 사이즈의 입국심사장은 단 2명의 사람만이 자리를 지켰다. 입국심사장을 지나고 열 걸음을 지나면 수하물을 찾는 곳. 싣고 온 컨테이너에서 직접 짐을 내려주는 모습이 창밖을 통해 바로 보이는 투명한 행정의 공항.



'뭐야, 이 어메이징한 회전초밥집은.'


그렇게 짐을 찾고 뒤를 도니 입국장이 끝이 났다. 그렇게 필요한 절차는 다 끝이 났다. 필요한 만큼만 채워진 공항. 군더더기 없는 날씬한 공항. 이래도 공항, 저래도 공항인걸.


하나부터 열까지 넓은 구색을 갖추자니 쉽지 않아 택한 방법. 다 품어내기에 너무 벅차다면 할 수 있는 것과 필요한 것에 집중하는 방법. 그래도 공항이고, 그래도 책이고, 그래도 글이며, 그래도 한 사람이다. 그런 공항도, 그런 책도, 그런 글도, 그런 사람도 누군가에게 공항으로, 책으로, 글로, 사람으로 느껴진다면. 네온싸인과 친절친절함 가득한 스크린에서 삭막함을 느낀 사람에게 베이직과 클래식함은 또 다른 기쁨이다.



여권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형광가득한 핑크색 스탬프가 찍혔다. 공식적인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린이들의 색. 마음 속에서는 이 상황들에 실웃음이 터져나온다. 아, 대체 이 여행,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출국심사장에서 가까스로 나온 B형과 함께, 공항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곳엔 가이드 D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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