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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Jan 05. 2019

'제주'도 좋다

서른 즈음에, 제주

유독 제주도와는 연이 없었다.

그 흔한 수학여행의 레퍼토리도 제주가 아닌 다른 곳이었고,

그러나 일말의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었다.

「언젠간 가겠지.」


때마침 제주행 티켓이 생겼다.

「이제 한 번 가보면 되는건가.」

조용하지만 적적하지는 않게, 12월의 제주도로.



바람은 차나 굵직한 야자수가 자리한 제주공항

서울의 꿉꿉한 미세먼지로부터 탈출하여

이 곳의 뻥 뚫린 하늘을 보니 해시태그를 남기고 싶다.


#LAX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엔 어륀지가 있듯이 이 곳엔 감귤이 자리한다.


여튼, 참 오랜만이야.

20년만이니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렌터카에 블루투스를 연결하고,

애플 뮤직으로 'Americano'를 검색한다.

이국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적당히 시골스럽게.


키낮은 건물들이 넓직히 깔린 제주 시내를 지나며

문득 다시 떠오른다.

LA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인 것 같다고.


그리고는 일단 저-쪽 우뚝 솟아있는 한라마운틴을 향해

운전대를 돌려본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운전대를 잡은 A가 갑자기 차를 세운다.


「와우.」



스르륵 올라온 해발고도에서는

하얀 지붕의 민가도 보이고

저 멀리 바닷가 풍차떼도 보이고

바다도 보이며,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니

윈도우 바탕화면.



그 기세를 몰아 나무가 우거진 절물휴양림으로 향했다.

바빴던 한 해를 기억 한 구석에 잘 여미기 위해

꼭 한 번 가려고 했었던 겨울숲.


본토에서는 잘 볼 수 없던 곧게 솟은 삼나무의 무리들 사이로

서서히 져무는 태양의 실타래가 내게로 다가와

왼쪽 관자놀이를 어루만진다.


A와 넓직히 떨어져 각자의 걸음을 걷는다.

사람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만큼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산새와 바람에 귀를 기울인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전망대 하나.

이젠 잎사귀 하나 없는 나무들을 보며

나도 한 해의 샷다를 내리는 것이 옳겠다 싶다.


저 나무처럼 나도 결국 잎사귀 하나 남아있지 않은 듯한데

그게 꽤 허무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차피 '무'로 돌아가는게 우리의 삶이라면

햇빛이 내리쬐든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눈이 오든

그럼으로 인해 다가올 변화를 받아들이겠다.



내일은 아마 비가 온다고 했던가.

해가 더 지기 전 멋진 노을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용눈이오름에 올라 석양을 맞이하자.


오름까지 이어진 길 곳곳엔 말들이 만들어낸 행복한 시간의 흔적들.

「네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흔적들을 차마 밟지 않으려 조심히 걷는 그 때,

말 두 마리가 저쪽에서 좌측통행을 하며 걸어온다.



적당한 때에 잘 올라온 것 같다.

햇빛이 억새와 잡초를 금빛으로 잔뜩 물들이며

저 너머 어떤 신세계로 우리 모두를 끌어당긴다.


봉긋 솟은 오름들과 저 너머 동네의 바다가 다시 한 눈에 보이자

속으로 잘 눌러왔던 분진들을 이 들판에 흩뿌린다.


응.

잘 살아오고 있는 중이다.



「운전 수고 하셨습니다. 짐 풀고 저녁 먹으러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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