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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Dec 22. 2023

슈테판 반켈홀 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

슈테판 반켈홀 전

(2023.12.16~2024.2.3, 쾨닉 서울)

화~토 11~19시. 일, 월 휴관. 무료


약속이 있어 한나절 외출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게 된다. 요즘은 다들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보고 있어서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다. 2020년부터 불어닥친 코로나 시기를 지나는 동안 어느덧 사람들은 서로 만나지 않고도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이제 팬데믹이 끝났지만 디지털 문명화의 속도는 더 빠르고 더 널리 퍼져나가는 중이다.  만남이 사라진 자리를 SNS가 대체하고 있지만 우라는 과연 만나지 않고도 삶을 지속 수 있을까?  


이번 '골목길 미술관' 여행을 위해 몇 군데 전시들을 검색하다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셔츠를 입은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여성을 처음 보았을 때, 그건 색감이 뛰어난 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한 점의 유화처럼 보였다.

쾨닉서울 (서울 압구정로 412 MCM HAUS 5층)

압구정 로데오 역 3번 출구에서 나와 청담동 명품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갤러리 '쾨닉 서울(könick Seoul) 이 있다. 전자사전을 찾아보니 독일어 'könick'의 뜻은 'King'.

'쾨닉 서울'은 몇 년 전 한국기업이 인수한 독일브랜드 'MCM'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는데, 현재 독일의 설치미술가 '슈테판 발켄홀(Stephan Balkenhol)'의 조각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MCM 매장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리면  '한 여자 <a woman>'와 '남자 <a man>'의 시선과 마주치게 된다.

<a woman> <a man> 2019.

 언뜻 '문학과 지성 시선집'의 표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들을 한발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림이 아니라 조각칼로 선을 파 낸 드로잉이다.

남녀가 쌍을 이루는 이 작품들은 마치 칼을 붓처럼 쓰는 예술가가 이곳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건네는 첫인사 같았다.


'슈테판 발켄홀(Stephan Balkenhol)'은 1957년 생 독일의 조각가로 지금은 통나무를 이용한 조각과 부조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설치미술가라고 소개해야 할 만큼 많은 그의 작품들이 세계 여러 도시 곳곳에 세워져 있다.


<Man, Black trousers, white shirt> 2019  

특히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잘츠부르크의 광장에 놓인 대형 황금공 위에 올라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기도 하고, 도심의 빌딩과 탑 위에, 심지어는 물 위 떠있는 배에 세워져 항해를 하기도 한다.

<Sphaere> 잘츠부르크 카피텔 광장 (출처:깡지님 네이버블로그)

'쾨닉 서울'에 전시된 다양한 크기 조각들과 선명한 컬러의 나무 부조들을 보고 나면 매우 독특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의 독창성이 느껴지는 지점은, 작품에 사용한 재료와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a qoman in yellow dress> 2019
내가 나무를 재료로 사용하는 이유는 다른 어떤 재료보다 예술가에게 결정권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이미 굳어있는 돌이나 액체 상태로 작업해야 하는 청동만큼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
다른 재료들과 달리, 나무는 특정한 모델을 앞에 두지 않고 작업을 하게 되는데 그럴 때 자연스럽게 작가의 어떤 면이 작품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냥 저절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Thaddaeus Ropac 갤러리 인터뷰 중        (잘츠부르크, 2017)

<파란 셔츠를 압은 여자> 2019

한마디로 그는 '나무'라는 재료를 쓸 때 가장 자유롭게,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나무가 작가인 그에게 자유로움을 주듯, 발켄홀 역시 나무가 작품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 기둥의 어떤 부분은 망치와 정이 내려치는 대로 깎이지 않고 빗나간다. 내리치는 망치와 정에 깎여나가는 나무의 각과 결을 그대로 둠으로써 재료의 참여를 허용하는 것이 슈태판 발켄홀의 작업 방식이다.


이번에는 그런 작업과정을 거쳐 나무 안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작품 속 인물들의 눈빛에 주목해 보자. 처음엔 이들이 입고 있는 빨간 셔츠와 노란 드레스 같은 산먕한 색상의 의상에 눈이 가지만, 관람객들을 작품 앞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그들의 눈빛이다. 전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인형의 유리 눈처럼 텅 빈 그들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본다. 그러나 그들과 '만나는' 데는 실패하고 돌아서게 된다.

그의 작품들은 어떤 메시지도 주지 않고 어떤 주장이나 설득을 하지도 않는다. 은근하게라도 말이다.

<흰 셔츠를 압은 남자> 2019
<빨간 셔츠를 압은 여자> 2019
<검은 수트를 압은 남자> 2019
<받침대 위의 남자> 2019

나는 무관심한 그들의 표정에 당황하다가 어느새 안도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들의 눈빛은 도심을 걸으며 늘 스쳐 지나갔던 이들의 것과 닮아있었다. 아마 다른 이들에겐 내 눈빛이 딱 그랬을 것이다.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안심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도시인들에게 익숙한 무표정 (용산 한님대로의 광고판)

작년 언젠가 국보인 '반가사유상'을 보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본관 2층에 새로 개관한 "사유의 방" 에는 국보 78호와 83호인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관람객들은 저마다 좌대에 앉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반가사유상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반가사유상 국보 78호(좌), 83호(우) 국립중앙박믈관

반가사유상 주변을 천천히 돌며 진흙으로 상을 빚고 거푸집을 만들어, 뜨거운 쇳물을 흘려 넣었을 삼국시대의 장인들을 상상하기도 했고,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저런 표정으로 세상을 살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관람객들은 쉼 없이 들어와 두 점의 반가사유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그 주위를 돌았다. 마치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처럼 말이다.

나는 반가사유상과 그들 사이 어디쯤에서 어정쩡 히 서있다가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되었다. 눈은 반쯤 감거나 반쯤 뜨고 있고, 입은 반쯤 웃거나 굳게 닫고 있는 청동조각상에서 놓지도 붙잡지도 않는 평화가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곳에 닿지는 못해도 잠시 머물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각별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무엇을 보든 결국 제 안에 있는 것 밖에 보지 못한다. 누군가 이 전시에서 슈테판 발켄홀의 작품들을 보고 '길 잃음'과 '텅 빔'과 '고립'을 읽었다면 그건 지금 그 사람 안에 있는 것과 정확히 일치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와 무엇을 느끼든, 슈테판 팔켄홀은 바로 당신에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작품들이 이곳에 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전시장을 나서며 다시 한번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남자'와 빨간 셔츠 혹은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을 본다.

우람한 나무기둥 앞에 선 작가가 전동 드릴과 망치와 정을 들고 수없이 깎아내고 남겨 태어난 남자와 여자들이 우리 앞에 서있다.

이 조각들 사이를 거닐며 우리가 들은 것과 본 것은 무엇일까.


쾨닉 서울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412 MCM HAUS 5층


https://naver.me/GEAmcY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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