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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Jan 08. 2024

우리는 각각의 시절을 산다.

Plave와 희자매 사이 어디쯤에서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해 온라인으로 떡갈고무나무 한그루를 주문했었다. 잎사귀가 대여섯 장 밖에 안 되는 어린 묘목이었는데, 3년 동안 꾸준히 키웠더니 이제 가느다란 줄기에 스무 장도 넘는 잎들이 달렸다. 줄기 아랫부분으로 갈수록 잎이 두껍고 색이 어두운 반면 꼭대기에서 새로 나는 잎들은 기름을 발라놓은 듯  반질거린다. 물을 줄 때마다 줄기 틈에서  촉을 내며 자라나는 잎들이 신기하다. 새로운 것은 항상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준비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서슴없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왔다.

이십 대 무렵, ' 김광석'과  '김건모" 혹은 '쿨' 같은 가수들이 무대에서 사라 자고 '핑클'과 S.E.S' , 'GOD' 같은 아이돌 그룹이 현란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들도  '신화'와 '빅뱅' 그리고 '소녀시대'로 교체되는 걸 보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구나' 했었는데, 그 후 언젠가 아예 얼굴조차 모르는 가수들이 예능프로에서 연예계 '시조새'로 불리는 걸 보고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삼십 대엔 내가 속한 세대에 의해 세상이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선호가 있을 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아이돌 가수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다반사고, 요즘 대세라는 '버추얼 아이돌'그룹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구세대가 되어버렸다.

아니,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애들이 왜 만화 뒤에 숨어서 활동하는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plave' 공연 영상을 검색해 보니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를 보는 느낌이어서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댓글의 반응은 나와 전혀 달랐다.


'멤버들 실력과 인품에 감동!!'

'버추얼이라서 노래와 춤에 더 집중하게 된다' '플뽕 오진다'

 등등 영문 모를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토록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직접 무대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다 그냥, '문리(세상 이치)'가 트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https://youtu.be/dE_ddOigeZA? si=IKjtUA9 DSPZr2 hGW


오늘은 하루종일 권여선 단편 소설 「각각의 계절」을 읽었다. 그중에 '실버들 천만사'이라는 작품에는 1978년대 히트곡이었던 '실버들'이라는 곡의 가사가 나온다.

김소월 시를 가사로 쓴 것이라는데 들어본 적 없어 이 곡도 유튜브에서 찾아봤다. 가수 인순이가 센터로 있는 당시 최고의 걸그룹 '희자매'가 판탈롱 바지를 입고 긴 팔다리를 격하게 흔들며 노래 부르는 영상이었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이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돌아선 님이야 어이 잡으랴."


실버들이 천 가닥 만 가닥 늘어져있어도 가는 봄을 못 잡는데, 두 손밖에 없는 내가 돌아선 님을 어찌 잡느냐는 내용이었다. 희자매의 율동과 '실버들'의 정서는 '버추얼 아이돌' 만큼이나 심리적 거리감이 느껴졌다.

 '정신 바짝 차리자.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다.'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달까.


「각각의 계절」은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이 나이 들어가는 이야기들이다. 시간의 틈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비틀어놓는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품고 살아가는 구질함과 빛나는 후회를 목격함으로써 우리가 사라지기 전에 나누어야 할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각각의 단편들이 뛰어난 묘사와 신선한 은유로 견고한 일상에 틈을 내준 덕분이다.


 세상은 멀리 보면 좋아져 왔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았던 때를 생각하면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오늘도 역시 세상은 쉬지 않고 나아져가는 중이라고 믿는다.

 기름을 바른 듯  반짝거리며 돋아나는 새순이 쉬지 않고 만들어지고 있듯, 이 세상에는 여전히 더 똑똑하고, 새롭게 애쓰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오고 있다. 뻔하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http://aladin.kr/p/mQnH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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