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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Nov 03. 2024

"어쨌든 우린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발명해야 해요"

화가 윤석남 Interview 1.

꽃 피우고 추수하던 계절의 활력이 사라지꺼져가는 체력과 기억력에 조심스레 몸을 보전하는 나이에도 아랑곳없이 매일 작업실로 출근해 붓을 잡는 화가가 있다. 올해로 여든여섯,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화가 윤석남.

결혼 후 집 안에서 줄곧 살림만 하다 마흔이 되던 해, 남편에게 받은 생활비로 몽땅 화구를 사 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작품 목록을 더해가며 찬란한 화양연화를 구가하고 있다.  


소위 '여류미술' 분류되며 미술계의 장식품처럼 취급되어 오던 여성미술의 흐름을 온 생명을 아우르는 시대의 목소리로 키워온 화가 윤석남을 찾아갔다.

하늘이 아진 가을 아침, 수원 근교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 도착하니 청명한 닭울음소리가 10월의 햇살을 타고 마을에 퍼지고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작업실로 들어서 천장이 높은 콘크리트 공간에는 클래식 FM이 흐르고 있고, 윤석남은 바닥에 펼쳐진 대형 초상화를 쳐다보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와 세월을 함께 해온 책들로 빼곡한 서가를 지나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자  윤석남은 가을 공기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음악 소리 때문에 문 여는 소리도 못 들었어요."

어깨가 부드럽게 굽은 윤석남은 우리를 소파로 안내하고 직접 전기포트에 찻물을 끓였다.

루씨: 이렇게 쉼 없이 작업하시는 게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으신가요?

윤: 제가 그림을 마흔 살에 시작했거든요.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려면 몸이 건강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침에 1시간씩 걷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나이에도 그림을 할 수 있는 것 같아. 그때 같이 그림 시작한 친구들은 친구들은 지금 다 손 놨어요.

루씨 : 80년대 초에 시작했던  '시월모임'* 멤버분들이시죠.

윤: 그렇죠. 김진숙, 김인순 또 김종례 같은 친구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었는데 지금은 안 그리더라고요. 저는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아요. 첨부터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나는 그린다, 그리고 이게 내가 살아있는 목적이다 생각하고 했던 거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좀 알아주긴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좋죠. (웃음)

(*'시월모임'은 1985년 활발하게 활동했던 민중미술조직으로, 한국 미술사에서 최초로 여성들의 불평등한 현실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다)


루씨: 그림보다 먼저 붓글씨를 배우셨다고요.

윤: 네, 박두진 시인께 4년간 서예를 배웠어요. 하루에 수백 장씩 막 써냈죠. 재밌어서 무지 열심히 했어요.  

루씨: 그림은 아니었지만 뭔가 새로 한다는 게 좋으셨군요.

윤: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동안 열심히 살림만 했잖아요. 시어머니 모시고 있지 남편 있지 애기 있지. 그러니까 낮에는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러다가 이제 밤에 식구들 다 자고 난 다음에 8시부터 밤 11시 12시까지 계속 쓰는 거야. 그렇게 하니까 그때부터 삶의 힘이랄까 그런 게 막 생기더라고요.

집에서 살림만 할 때는 '대체 나는 왜 태어났지? 뭘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지?' 이런 질문이 계속 따라다녔었거든요.

그래도 아주 어릴 때부터 '난 마흔 살이 되면 그림을 그릴 거야'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막연하게요. 그런데 정말 딱 마흔 살 되 해 4월에 그림을 시작했잖아요.

루씨: 어떻게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윤: 국민학교 3학년쯤이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소설가였기 때문에 집에 책이 많았고 그래서 미술이라는 게 있다는 건 알았어요. 

(*윤석남의 아버지 윤백남 1888~1954 은 우리나라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의 감독이자 극작가, 소설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학교에서 미술 시간이라는 게 있었어요. 선생님이 의자 하나 앞에 갖다 놓고 반에서 제일 예쁘게 생긴 아이를 앉히더니 저희에게 그리라고 하셨어요. 교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는데 얘가 부끄러우니까 얼굴을 이렇게 찡그리는 거예요. 걔가 자주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그걸 표현하려고 까만색 크레파스 하고 빨간색 크레파스하고 막 섞어서 그렸어요. 그런데 어머나,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3월이었어요. 그 장면을 안 잊어버려요.

그때 처음으로 '나는 화가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었지만, 대학도 못 갈 정도로 가난한데 무슨 그림을 그리겠어요.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내가 마흔 살쯤 되면 생활이 안정되겠지?' 그렇 생각했어요. 결혼하고 나서 죽 시어머니 모시고 살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냥 난 이렇게 책이나 읽자 그러면서 40살까지 살았죠.

그림을 시작할 무렵의 작가 (사진 박영숙, 윤석남 소장)

루씨: 어린 딸을 키우며 시어머니를 모시는 집에서 그림을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윤: 그렇죠. 제 방이 따로 없으니까 식탁 의자에 앉아서 그림 그리기 시작했어요. 저희 딸이 기어 다녔을 무렵이에요. 그래도 그때 여유가 좀 생겼어. 그래서 일하는 아줌마가 와서 애기를 봐주면 나는 그림 그리고, 아줌마가 가고 나면 밤에 애기가 잔 다음에 계속 그리고 그랬죠. 근데 그렸다고 해도 연필하고 스케치북 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시작했죠.


루씨: 처음 그림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나는 뭐 하러 태어났지'라는 질문이었다고 했는데, 거의 10년 간 줄곧 어머니를 소재로 그리셨죠.  왜 어머니를 그리셨나요?

윤: 그림을 시작할 때 어쨌든 대상이 있어야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저는 원래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지 일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지 생각해 보니까 그게 바로 내 친정 엄마야. 그래서 시어머니 모시고 살던 집에 어머니를 오시라고 해서 그리기 시작한 거예요.

 

어머니와 딸들 (작가 소장)

루씨 : 사진 속에 계시는 분이시죠?

윤: 네, 고생 많이 하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글 쓰는 사람이니까 얼마나 가난했겠어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우리 엄마가 사른 아홉 살이었어요. 애는 여섯 명이고요. 정말 집도 없고 절도 없다는 게 딱 우리였어요. 먹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예요. 어머니 말씀이 그 시절엔 정부에서 금호동 땅을 30평 정도 그냥 나눠줬대요. 그 땅을 받아가지고 거기서 흙벽돌을 찍으셨어요. 저도 같이 가서 찍었던 기억이 나요.


루씨: 벽돌을 왜 만드셨어요?

윤: 집이 없으니까 집을 지으려고 벽돌을 직접 만들었던 거죠. 나무로 된 틀에다가 시멘트 하고 흙 하고 이렇게 섞어서 발로 막 밟거든요. 그런 다음 그걸 말려요. 그 벽돌을 가지고 방 두 개, 마루 하나, 부엌이 있는 집을 지었어요.


루씨: 서른아홉 살 여성이 여섯 명의 아이를 데리고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지다니 상상이 안됩니다.

윤: 그렇죠? 그것도 기와를 얹을 수가 없어서 지붕 대신 천막을 대충 얹어놓았기 때문에 비 오면 막 물이 샜어요, 방 안에. 그럼 그걸 받아내고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거기서 살았어요.

그래도 어머니가 공부는 꼭 해야 된다 그러셔서 고등학교 공부까지 마친 거예요.

그때 막내가 2살이고 언니가 이화여대 1학년이었는데 끝까지 학교를 못 다녔어요. 그래도 아버지 이름 덕에 언니가 신문사 기자로 취직해서 그거 가지고 온 식구가 먹고살았어요. 3년 동안.


루씨: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해도 어린 마음에 가난이 부끄럽거나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

윤: 근데 전 원망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고 엄마가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저희를 어떻게 키우셨냐면요. 눈뜨면 날마다 애를 업고 금호동 집에서 왕십리까지 1시간 반을 걸어가서 밭에서 풀 뽑는 일을 하셨어요. 일을 하고 나면 돈을 주는 게 아니라 시금치니 배추니 이런 야채를 한 보따리 주는 거야. 그럼 그걸 가져와서 삶은 다음에 금호동 시장에서 파셨어요. 서른아홉 살 먹은 젊은 여자가 그렇게 살았어요. 지금은 상상이 안 되는 일이죠.

<행상> 1992.

루씨: 그런 상황에서도 여섯 아이를 데리고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셨군요.

윤 : 래도 어머니는 '우리 이제 어떻게 사니' 이런 말을 한 번도 하신 적 없어요. 그리고 꼭 자기 전에는 옛날 얘기해 주고요. 어머니가 책 읽는 걸 무지 좋아했거든요

우린 쌀이라는 걸 본 적이 없어요. 3년 동안 거의 밀가루로 수제비 떠가지고 먹고살았어요. 그러니 도시락을 어떻게 싸. 그래도 나중에 친구들 얘기 들어보니까 그때 내가 굉장히 부잣집 딸인 줄 알았대. 


루씨: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윤 : 애들이 도시락 먹는 시간에 나는 아마 밖에 나가있었을 거예요. 가서 책을 본다든가 글을 쓴다든가 했겠죠.

쟤는 집에서 먹었으니까 안 싸왔겠지 뭐 이렇게 생각했나 봐, 나는 그냥 명랑 쾌활했으니까. 지금처럼. 가난하다는 생각이 아예 머릿속에 있지도 않았어요.


루씨: 선생님께서 마흔 살이 돼서 그림을 시작하셨을 때 어머니의 반응은 어떠셨나요?

윤 : 너무 좋아하셨죠. 너무. 어머니는 평생 말이 없는 사람이셨어요. 그래도 딸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이 됐다는 게 어머니는 행복하셨겠죠. 그리고 남부럽지 않게 서른몇 평 아파트에서 시어머니 모시고 살고 있으니까 뿌듯해하셨어요.


루씨: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윤 : 어머니가 아버지 하고 스물네 살이나 차이 나요. 아버지는 유명한 소설 가고 이미 결혼을 하신 상태였어요. 그런데 부인이 정신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이 마흔세 남자가 어느 집에 하숙을 들어왔는데, 그 하숙집 딸이 우리 엄마였어요. 그때 어머니는 동아일보에 윤백남이 연재하는 소설을 열심히 읽고 있었고, 동네 할머니들도 우리 어머니가 읽어주는 소설을 들으려고 매일 우리 집에 왔었대요. 동네에 한글을 아는 사람이 어머니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우러러보던 남자가 자기 집으로 하숙을 들어왔으니 이 여자가 정신이 확 나갔지. 첩이고 뭐고 무슨 관계가 있었겠어, 열아홉 살짜리가 마흔세 살 먹은 남자한테 그냥 빠진 거죠. 둘이 첫 딸을 낳자마자 만주로 도망간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주 출생이에요.


루씨: 아버지께는 어떤 영향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세요?

윤 : 아버지가 글 쓰시는 분이니까 먹고사는 데는 뭐 아무 생각이 없으셨지만 저희 하고는 아주 잘 놀아주셨어요. 나이는 할어버지 뻘이지만 저희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런 생각전혀 안 들었어요.

그 시절에 글 쓰고 유명했던 우리 아버지 덕에 책도 많이 읽었고 미술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거예요.


윤석남은 인터뷰 중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았다'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비가 새는 집에 살고 도시락을 싸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도 아무렇지 않았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말이다. 어쩌면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란 자신이 살아온 삶 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어떤 불운도 범접할 수 없는 낙천성을 물려주신 어머니와 책이라는 문을 통해 지혜와 상상이 만들어낸 세상으로 발을 딛게 해 준 그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곧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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