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씨: 그림을 하겠다고 선언하시고 독학으로 4년 만에 첫 전시를 가지셨는데요, 떨리지는 않으셨나요.
윤 : 어렸을 때부터 마흔 살이 되면 그림을 하겠다고 생각을 해와서 그런지 그냥 편안했어요.
미술대학도 안 나온 데다가 늦게 그림을 시작했으니까 미술계에서 버티는 것이 어렵지 않았냐고 많이들 물어보시는데요, 저는 그냥 그런 생각 없이 했어요. 너무 하고 싶었던 거니까요.
처음부터 전시 제목을 <어머니>라고 붙이고 두 번째 전시까지 그렇게 했어요.
<어머니 1-열아홉 살> 1992
<어머니 2-딸과 아들> 1993
루씨: 첫 번째 전시를 끝내고 2년간 미국을 다녀오셨죠. 그 후에 선생님 작품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나요?
윤 : 가서 그림은 하나도 안 그렸어요. 그냥 뉴욕 소호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그림을 무지하게 많이 봤어요. 우리나라는 전시한다고 하면 한 일주일 정도하는데 거기는 전시를 한 달씩 하더라고요. 미술관은 다 무료로 들어가서 볼 수 있으니까 본 것 또 보고, 본 것 또 보고 수십 번을 봤어요.
루씨: 1980년대에서 90년대는 미국에서는 페미니즘이 굉장히 붐을 일으킬 때였죠.
윤 : 맞아요. 그때 브루클린에서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rougeois, 1911~2010) 전시를 봤어요. 정말 놀랐죠. 천정에서부터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딱 내려와 있는데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지하철 타고 일주일에 몇 번씩 가서 봤어요. 물론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고 작가는 드로잉만 했겠죠. 그런 거 상관없이 그때부터 루이스 부르주아가 저한테는 하느님이었어요.
<마망, Maman> 1999 (출처 나무위키> / 루이스 부르조아의 대표작으로, 가느다란 다리로 땅을 딛고서서 알을 품고 있는 청동거미는 자식을 돌보는 '모성'을 상징한다
루씨: 그때 우리나라에서도 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민중미술이나 페미니즘 미술이 막 생기기 시작했었죠.
선생님도 민미협(민중미술협회)에서 활동 제안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윤 : 거기 들어가서 김인순, 김진숙, 윤석남 그리고 그 밑에 후배 여성 작가들 몇 명 해서 '여성미술연구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나는 뭐든지 앞에 나서는 걸 너무 싫어했으니까 김인순 씨를 앞에 막 내세웠지.
그때 비로소 여성 미술이라는 의식이 머릿속에 들어온 거예요. 그전까지는 '여성 미술'이라는 말도 없었고 페미니즘이라는 말 자체도 몰랐어. 그때부터 제 그림도 달라졌어요. 이제 어머니 얘기는 그만하고 내 얘기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팡크 룸 4> 1995. (윤석남 홈페이지)
루씨: 그 시기에 나온 작품이 <핑크 룸> 시리즈입니다. 저는 그 작품을 실제로 보지는 못하고 사진으로만 접했는데요.
분홍 소파에 쇠갈고리가 솟아나 있고 한 여성이 자개 옷을 입고 있는 장면이 마치 연극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 핑크 소파에 놓여있던 여성은 선생님 자신이셨죠?
윤 : 그럼요. 당연하죠. <핑크 룸>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인물도 없었어요. 의자 하나만 있었죠.
1인용 의자에 핑크색만 칠해놓고 감히 거기다 자기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렇게 시작했죠.
그 의자가 나 자신이었어요. 근데 거기 보면은 이렇게 발이 이렇게 송곳 위에 서 있잖아요.
간신히 서 있는 거예요.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아니고요. 앉고 싶어도 못 앉는 그런 상태.
여기도 속하지 못하고 저기도 속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를 그 의자로 표현한 거죠.
소파의 색깔도 그냥 편안하고 부드러운 핑크가 아니라 형광 핑크예요. 붕 떠 있는 색이죠.
제가 느꼈던 공허함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형광 핑크를 쓴 거예요.
루씨: 바닥에는 구슬이 깔려 있어요.
윤 : 반짝반짝한 구슬이 깔린 방은 너무나 예쁘죠. 그런데 그 방에서는 아무도 서 있을 수가 없어요.
여성들이 집안에 편안히 머무는 것 같아 보여도 자기만의 공간이 없잖아요. 당시에 그래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였지만 집안 어디에서도 제가 편안히 있을 만한 곳이 없었어요.
방이 세 개였으니까 하나는 시어머니, 하나는 딸, 그리고 남편과 제가 한 방을 썼었는데, 그림 그릴 때는 그냥 부엌에서그렸죠. 부엌 의자가 내 자리였으니까요.
<핑크 룸>이라는 작품은 '남들이 보기에는 아름답고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게 나한테 맞는 옷이 아니야'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니들이 이 핑크 색깔을 아니?' 이런 질문을 던졌던 거죠.
루씨: 남들이 보기엔 별 문제없어 보이는데, 스스로 병들어간다는 고립감은 아마 여성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것 같습니다.
윤 : 남편은 나가서 사회생활하면서 자기만의 영역이 쌓여가는데 나는 맨날 그릇이나 닦고 걸레질이나 하고 이게 내 일이 돼버린 거잖아요. 근데 나는 이걸 내 일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거죠.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 얘기를 했던 작품이에요.
<핑크 소파> 2004
루씨 : 조각이나 회화는 전시가 끝나고 나면 컬렉터들이 구입하기도 하고 작가가 소장할 수도 있데 이렇게 큰 설치 작품들은 전시가 끝나면 어떻게 되나요?
윤 : 그냥 내가 가지고 오는 거죠. 누가 사. (웃음)
왜 그게 팔리기가 힘드냐 하면 이런 작품은 미술관에서 살 수밖에 없어요. 근데 이 작업은 당시 그 공간에 딱 맞춰서 한 거잖아요. 미술관마다 상황이 다 다르니까 팔릴 수가없고 그냥 집으로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던 사람이에요. 당시에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그림 그리는 데 쓸 수 있을 만한 충분한 돈을 줬어요. 그동안 저도 최선을 다해 살아왔거든요.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고, 사치라는 건 조금도 모르고 살았으니까 남편도 그걸 알죠. 제가 그림 그린다니까 '누가 말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이렇게 된 거죠.
루씨: 윤석남 작품의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남다른 스케일이 아닐까요.
<빛의 파종>이라는 설치작품에서는 무려 999개의 목상을 만들어 세우셨어요.
윤 : 그 작품은 어떻게 나왔냐면요. 제가 1996년에 제8회 이중섭 미술상을 받았어요. 그걸 받으면 1년 후에 전시를 해야 되는데, 그때 제 마음속에 '천 명의 여성들이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왜 천 명을 안 만들었냐 하면, 우리는 아직 완벽하지 못하니까요. 999에서 1,000까지 그 한 명 채우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요.
<빛의 파종-999>
<빛의 파종 -999>
<빛의 파종 -999> detail
루씨 : '1,000'이라는 숫자는 여자와 남자가 함께당당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말하는 거군요.
윤 :맞아요. 우리 때만 해도 얼마나 차별을 받았는지 말도 못 해요. 저도 남동생 공부시키기 위해서 대학을 안 갔거든요. 하지만 그게 뭐 비애스러운 게 아니라 당당한 거였어요. 누군가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당당하게 여기는 이 의식 자체가 얼마나 반여성적인 거예요. 근데 그게 몸에 박혔어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저는 그걸 벗어나려고 끝까지 그림을 하는 거예요. 자기를 표현하지 않으면 그걸 벗어날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