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씨: 숫자로 된 또 다른 작품이 있죠. 이번에는 천 마리가 넘는 유기견 목상으로 완성된 <1,025-사람과 사람 없이>입니다. 무려 5년 동안 이 작품에만 매달리셨다고요.
윤 : 2004년엔가 동아일보사에서 개인전을 할 때였어요.
전시장에서 우연히 신문을 보는데, 이애신이라는 할머니가 1,025마리의 유기견을 보살피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걸 읽고서 바로 그분을 찾아갔죠. 그때 제가 거기 가서 그 유기견들을 보고 정말 인간에 대한 혐오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왔어요. 예쁘다고 키우다가도 필요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그런데 또 그 버려진 생명을 거두고 키우는 것도 결국 사람인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누군가가 버린 개를, 그것도 한두 마리도 아니고 천마리가 넘는 개들을 보살피는 사람이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잖아요. '이건 여성의 힘이야' 이런 느낌이 안 들었겠어요. 너무 감동했죠.
루씨 : 그러고 보니 '캣맘(cat mom)'은 있지만 '캣대디(cat daddy)'는 없네요.
생명을 거두는 일은 왜 항상 여성의 몫일까요, 여성의 유전자에 심어진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윤 : 여성은 어쨌든 뱃속에서 아이를, 생명을 키우고 남자들은 그냥 씨만 보내잖아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생명에 대한 어떤 경외감 같은 게 생기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고 너무 그걸 강조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서 여자들을 희생시키잖아요. 그건 또 싫어.
루씨 : 사실 초기에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하셨을 때 당시 언론에서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을 키워낸 모성의 위대함' 이런 시각으로 많이 보도되었어요.
윤 : 그렇게만 얘기하면 정말 너무 속상하죠.
루씨 : 요즘 여성들은 그런 모성을 결코 원치 않죠. 무엇보다 모성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여성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데 큰 걸림돌이기도 하고요.
윤 : 당연하죠. 그런 공정하지 못한 모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어쨌든 사랑이라는 게 몸에 배어 있어요. 저는 살아가면서 그 사랑을 구현하는 게 여성의 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의 삶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 보듬고 사랑해야죠.
다른 사람을 돌보느라 내 삶을 전부 희생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봐요.
또 내 자식만 사랑하는 건 모성이 아니에요. 그건 이기주의고 가족주의죠.
그걸 확장해야 돼요. 사회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크고 넓은 마음이 바로 모성이거든요.
루씨 : 지금 작업 중인 초상화의 주인공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시죠.
윤 : 이 초상화 시리즈는 몇 년 전에 국립박물관에서 윤두서 초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 시작하게 됐어요. 그 눈빛이 마치 살아서 저한테 뭐라고 말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수많은 초상화 중에 여성을 그린 건 단 두 점 밖에 없더라고요.
그때 제가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려야겠다 생각했어요. 자료는 뭐 너무 부족하죠. 그래도 사진 한 장이라도 있으면 그걸 붙들고 공부하고 상상하고 해서 그려요. 지금까지 한 구십 명 정도 했어요. 백 명이 목표인데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요.
루씨: 초상화 속의 여성들의 눈빛이 강렬해서 놀라고 그림의 크기에 한번 더 놀라게 됩니다. 정말 압도적인 존재감이에요.
윤 : 전 저게 큰지 아닌지도 몰랐어요. 그냥 제일 큰 종이가 저거더라고요. 저보다 더 큰 거 있었으면 더 크게 했을 거예요.
루씨: 자화상 작업도 여러 점 하셨죠? 보면서 작가의 영혼이 느껴졌습니다.
윤 :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게 거의 이십몇 년 전이죠.
처음에 시작한 건 뭐 굉장한 자화상을 하겠다고 시작한 게 아니라 모델이 없었으니까 그냥 거울보고 나를 그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내 얼굴 그리면서 인간의 골격이나 이런 구조를 공부하는 거였죠.
거울 보고 그리다 보니까 작품 속에 눈들이 다 이렇게 노려보고 있어요. 그래서 다 사나워 보여요. (웃음)
젊은 시절, 막 그림 시작하려고 했던 윤석남에게, 86세 윤석남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윤 : 나는 항상 '그래, 너 정말 그때 미술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거 대단해. 고마워' 이런 생각을 하죠. 그리고 그 시절의 윤석남을 안 잊어버리죠.그때 절망하지 않고 계속해 왔다는 점에서, 또 마음먹을 걸 제대로 잘해 왔다는 의미에서 저한테 상을 주고 싶어요.
'그래 너 정말, 참 대단하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한테 칭찬을 해주고 싶어.
루씨 : 마흔 살의 윤석남이 마음속에 품었던 '내가 왜 태어났는지 알고 싶어'라는 질문에 누구보다 자신 있게 대답하시게 되었고요.
윤 : 사실 사람이 태어난 이유라는 건 없어요. 자기가 그 이유를 발견하는 것뿐이죠. 난 누구든지 그 이유를 발명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무슨 큰 일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정말 바느질을 좋아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바느질을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한다면 이게 바로 그 사람이 태어난 이유인 거죠. 부엌에서 식구들을 위해 일을 하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그 일을 할 때 자신이 정말 행복하면 거기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모계 가족> 2018
빨간색과 검은색 크레파스를 섞어서 자주색 스웨터를 그렸을 때 짜릿함을 느꼈던 어린 윤석남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선명하게 직감했을 것이다. 그날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살아왔던 그는, 사실 이미 오래전에 되어야 할 자신에 이른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지금도 맹렬하게 자신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더 오래도록 그림을 그리고 싶어 매일 걸으며 체력을 키우는 이 사랑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이 사랑 속에 부지런히 태어나는 그의 작품을 어찌 경이로운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