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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Apr 15. 2024

54. 일기떨기

"아빠, 그래도 우리 재미있게 살자."




 페낭에 있는 동안 작업곡 외에 거의 아무 노래도 듣지 않았다. 예전에 여행을 가면 그 도시의 테마곡처럼 노래 한 곡을 선정해 듣는다고 말했던 적 있었는데, 페낭에서는 일부러 듣지 않았다. 대신 동남아 거리를 활보하는 신기하고 웃긴 새소리와 끊이지 않는 오토바이, 이른 아침을 준비하는 길거리 가게들의 분주한 칼질과 튀김 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찰나의 고요함을 들었다. 음악을 듣지 않은 건 최대한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걷기는 쉼인데, 음악을 들으면 또 어떤 각오들을 하게 돼서.


 페낭은 재미있고 신기한 섬이다. 관념적 아시아의 최종편이랄까. 백인 빼고 다 있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양한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그만큼 문화가 뒤섞인 곳이었다. 불교 사원 옆에 흰두사원, 그 옆에 이슬람 사원, 누구는 라마단 기간 누구는 히잡, 누구는 크롭티. 음식은 또 어떤가. ‘페낭에서 맛없어서 망한 가게가 쿠알라룸프에서는 맛집된다’라는 이곳 농담이 있을 정도로 페낭은 미식의 섬이다. 음식에 관심 없는 나조차도 매끼니 맛을 찾아 다닐 정도로 정말 모든 게 맛있었다. 한국에서 규칙적인 삶을 살았더니 이곳보다 1시간 느린 페낭에서 새벽 4시에 기상했다. 날은 덥지만 한국의 여름보다 해가 늦게 뜬다. 7시는 되어야 하늘이 푸르러지니. 새벽에 일어나 내가 할 일은 일뿐. 페낭에 있는 동안 되도록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하며, 37도 더위에 2시간씩 걸었다. 정리된 건 없고 더 복잡해져 왔다.


 아빠의 휴가 기간을 몇 차례 확인하고 떠났는데, 아빠가 나를 배신하고 내가 페낭에 있는 기간 동안 한국에 왔다. 다행히 아빠 출국 전에는 한국에서 돌아와서 나흘 정도 함께 지냈다. 어느 하루, 저녁 든든히 먹고 아빠와 밤 산책 2시간을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언니 결혼은 올해 말이고, 부모님석에 엄마가 앉을 수가 없어 아마 고모가 앉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말을 하며.


“아빠도 헛헛하지?‘

”뭐, 그렇지.“

”앞으로도 이런 순간이 많겠지?“

”어쩌겠어. 그러려니 하는 거지.“

”아빠, 그래도 우리 재미있게 살자. 늘 헛헛함을 느끼더라도, 그래도 최대한 즐겁게 살자.“


아빠는 그러자고 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2. 선란

『무너진 다리』 『어떤 물질의 사랑』『천 개의 파랑』『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나인』『노랜드』를 썼습니다.

  환경파괴, 동물멸종, 바이러스를 중심으로 SF소설을 씁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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