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초
버스에서 내린 4월 중순 속초의 아침은 아직 덜 깬 꿈으로 다시 데려가 주는 자장가다.
젖을 듯 말 듯 흐린 봄비 속에 전성기가 지난 분홍 벚꽃 내음이 녹아 있다. 티백이 들어있는 일회용 잔의 녹차를 한 모금씩 축일 때마다 진해지는 맛처럼, 한 걸음걸음이 느려지고 허파의 폐포 폐포 하나가 다 분홍 내음으로 착색되는 듯하다. 터미널은 도시의 중심지면서 바다와 가까웠지만 큰길에 사람도 보이지 않고 바다 냄새도 나지 않는다. 오 분도 안 되는 거리를 이십 여분을 걸으며 사십 년 일상의 조각들이 꽃 향기를 브금(bgm)으로 랜덤 재생되었다.
일상의 조각들은 정돈된 LP판이 아니라 케이스를 빠져나와 엉켜버린 녹음테이프 마냥 뒤죽박죽이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행동, 사건 의 인과 관계는 전무하고 그때 그때의 감정, 느낌들이 주로 이미지의 형태로 튀어나왔다. 그것조차도 이전에 몇 번 곱씹어 본 기분들은 처음의 느낌과 달리 여러 번 녹음을 한 테이프 조각처럼 왜곡되었을 것이다.
이미지는 작은 개울가 옆 바위에 튀겨진 물방울 하나속에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서 물의 상큼함에 심장 저려한다던가, 살색 물감을 짜 놓은 팔레트 칸에 빨간색 물감이 실수로 떨어졌을 때 혀를 통해 느낀 피맛, 시험 종료 5분 전 급작스럽게 사정할 것 같은 쩌릿함을 억지로 참을 때의 대뇌피질에서 회색으로 타오른 연기 따위들이다.
꿈에서 완전히 깨어있을 때 그렇게 중요했던 사람들과 지식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찬장 속 엄마 지갑에서 몰래 꺼낸 백 원짜리 동전으로 문방구에서 산 비눗방울을 돌려가며 후후 불던 앞니 없던 그 아이는, 완전군장으로 행군하다 생긴 물집을 서로 터트려주던 그 훈련병은, 헤어지니 마니 격렬히 싸우다 결국 서로 품에 안고 펑펑 울었던 여인도, 쪼그려 앉아 개미를 관찰하다 고개 돌려 미소 지은 나를 닮은 아이도 없었다. 며칠간 억지로 외웠던 두개골의 여러 구멍으로 지나가는 신경의 이름들, 페르마의 없는 정수를 만들어 보려 종이를 채웠던 낙서, 팔이 하나밖에 없냐는 조롱 속에 배웠던 실매듭 만드는 기술 같은 것은 정신을 차리고 차분히 글을 쓰고 있을 때나 억지로 되짚을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뭐지? 깨어 있을 때 나와 나 나와 타인 타인과 타인의 관계에서 오욕칠정을 느끼고 그 관계에서 실제 존재하는 어떤 것인지, 타인이나 사건 물질 심지어 나조차도 대상으로 느끼는 몇 가지 감각들이 만들어 낸 관념인지 모르겠다. 둘 중 어떤 것이던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더 살아서 심장이 죽고 뇌가 죽기 직전 찰나에 느끼게 될 사망 체험도 오늘 속초와 같다면 앞으로의 40년은 어떤 이미지로 채워질지 흥미로울 뿐이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직장의 유리 정문을 열고 바삐 지나는 사람들을 얼마쯤 지나쳤을 때 이틀 전에도 치맥을 같이 했던 동료가 오른손으로 악수하고 왼손은 내 어깨에 얹은 채 미소 띤 얼굴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