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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지 Jun 25. 2019

이런 건 나도 만들겠다고?  그건 네 생각이고

‘이런 것’을 결코 하지 않을 사람들이 쉽게도 던지는 말


언젠가 우리도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잡지사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취재차 작은 영화제에 간 적이 있다. 학부생 시절에도 가본 적 있었지만 그해는 좀 특별했는데 대학 동기가 한 작품에 배우로 출연한다는 걸 미리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영화 속에서 친구는 ‘체육 교사’ 역할로 나왔다. 파란 추리닝을 입고서 사투리 억양으로 짧은 대사 몇 마디를 한 게 전부였다.


아는 얼굴을 스크린에서 보는 건 낯설면서도 어딘가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영화관을 나오며 같이 갔던 친구와 서울말도 부산말도 아닌 어중간한 그 말투를 흉내 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학교 앞 술자리에서 다 같이 만났을 때, 친구의 대사를 따라 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지 못한 친구들도 덩달아 놀리기에 동참했다. 그런 것에 기죽을 리 없는 친구는 연기를 하는 자기 자신을 성대모사했던가, 같이 웃다가 우리에게 휴지를 던졌던가.


우린 다들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서로가 겪는 숱한 도전과 잦은 실패들을 그냥 놀리는 게 더 쉬웠던 시절. 시시때때로 스산해지는 마음이나 말로 설명하기 애매한 감정들은, 그냥 한바탕 웃고서 잊어버리는 게 나았다. 너무 오래 생각하면 상처받을 테니까. 영영 아무것도 되지 못할지 모른다는 초조함을 누군가 발설하는 순간 이 자리는 우울해지고 말 테니까. 술병이 하나둘 비어갈 때마다 우리는 상상했다. 언젠가 우리도 ‘무언가’가 되어 있겠지. 우리에게도 무언가가 될 기회란 게 오겠지.



이런 건 나도 하겠다는 사람은 결코 하지 않는 것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는 건 초조함과 함께 왔다. 동기들이 뿔뿔이 기업체로, 은행권으로 취직할 때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만 캠퍼스에 남았다. 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일, 오지 않았으니 모르는 미래는 그저 불안할 뿐이었다. 주변에선 쉽게 말했다. 그 정도 재능 가지고 되겠냐고. 무난한 재능에 매달리느니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게 나을 거라고.


그 시절 내가 제일 듣기 싫어했던 말은 “이런 건 나도 하겠다”라는 농담이었다. ‘이런 것’을 결코 하지 않을 사람들이 쉽게도 던지는 말. 누군가 꾸준히 SNS에 올리는 그림에 흘낏 눈길 주며 하는 말들. 독립서점의 크고 작은 출판물들을 대충 넘겨 보면서 하는 말들. 작은 빵집에서, 수공예 상점에서, 누군가 공들여 만든 것을 들었다 놓으며 하는 말들. 거기 담긴 한 사람의 오랜 시간과 해묵은 초조함과 그럼에도 여전히 만드는 일을 놓지 못하는 마음을 전혀 보지 않는 말들.


재능이나 성공 같은 건 생각보다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이런 건 나도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지 않는 일을, 누군가는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말 많은 사람들이 재능을 따지고 성공 여부만을 재고 있을 때, 그들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만든다.


‘하고 싶은 일’을 좇는다는 게 젊은 날의 치기일지 아닐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그 일을 놓지 못하는 게 어설픈 재능에 대한 미련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도, 말을 거드는 주변 사람들도. 그저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재능이 있다 없다 말하는 것은 쉽고, 그 정도론 안 될 거라 말하는 것도 너무 쉽다. 하지만 계속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언가를 해내지 않았어도 ‘하고’ 있다면


어쩌면 젊은 날의 우리에겐 시간이 많았다. 이 정도 재능으로는 안 된다거나, 언젠가는 꼭 할 거라거나,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말로 한 걸음 물러서서 삶을 구경만 할 때. 그때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십 년이 지나 우리가 서로 다른 곳에 서 있게 되었다면 그건 그동안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얼마 전, 그 시절 작은 영화에 그보다 작은 역할로 나왔던 친구가 드라마에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전히 큰 배역은 아니었지만 카메라 앞에서 그는 열심이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닌 탓에 이렇게 안부를 알게 된 게 신기하기도 했다. 동기들이 취업을 해서 하나둘 학교를 떠날 때 그라고 불안한 마음이 왜 없었을까. 그럴 때도 그저 묵묵히 걷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취직하라는 잔소리들 틈에서, 너 정도 하는 애들은 쌔고 쌨다는 가시 돋친 말들 속에서. 만나지 못한 시간이 길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기어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무언가를 ‘해내지’ 않았어도, 여전히 또 꾸준히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20대 내내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또래들이 지은 수많은 책과 영화와 시와 그림들을 훔쳐보았다. 감탄하고 부러워하고 흠모하고 질투했던 그 많은 작품들. 그걸 만든 이들 중 몇이 남았을까? 여전히 ‘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가끔씩 그런 것을 궁금해하며 나는 한 땀 한 땀 시간을 깁듯 누가 볼지도, 어쩌면 아무도 안 볼지도 모를 글을 쓴다.


‘한 방’ 같은 건 영영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꿈을 거두지 않았다. 혼자인 길을 함께 걸어주는 것은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다 누군가는 마침내 원하던 곳에 닿고 누군가는 닿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건 여전히,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대학내일 895호] Writer 김신지 ILLUSTRATOR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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