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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스 Aug 16. 2022

밥 먹듯 킬 되는 기자라고?

비둘기라는 별명을 가진 기자

(지금이야 도심 골칫덩이지만) 올림픽이나 국제행사에서 늘 등장하는 새,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다. 마찬가지로 평화의 아이콘이란 뜻에서 내 오랜 별명은 비둘기였다. 모든 사건을 평화롭게 킬 시켜버리는 재주가 있다. 기자 세계에서 킬이란 기사감이 되지 않는다는 뜻. 평화로운 살인자라는 별칭은 기자로서 그다지 유쾌한 말이 아니다.


예를 들면 파급력이 상당할 것 같은 큰 사건이라 딥하게 취재를 지시했지만 내가 알아보면 단순 사건으로 종결된다거나, 섭외하고 촬영에 인터뷰까지 다 해놨는데 기사가 큐시트에 오르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이 반복된다고 보면 된다. 어렵게 설득해서 귀한 시간 내준 인터뷰이에게 이 피치못할 상황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양해를 구한들 다시 기사가 되는 것도 아니기에 더 죄송하다. 이럴 때야말로 중간에서 애가 탄다. 아주 곤혹스럽다.


그런 내가 최근 작두를 탄다거나 사건을 몰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무슨 말이냐고? 발제만 하면 그 타이밍에 비슷한 사건이 생긴다는 거다. 기획 기사의 특성상 시의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고정된 날에 방송되지 않으면 주말로 밀리기 일쑤다. (물론 요일 코너이기 때문에 방송일이 밀리는 건 일반적이지 않지만, 선거라는 빅이슈나 예기치 않은 특보가 편성되면 아예 안될 일도 아니다.) 헌데 기사가 나가는 날 비슷한 사건으로 이슈가 생기면 기사에 힘이 실린다. 기존 사건 사고를 경험해놓고도 같은 사고가 반복되는 건 제도적 보완이 미흡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꼴이어서다.



[다시 간다] 첫 화는 광주 붕괴 사고를 다뤘다.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구역에서 철거 중이던 5층 건물이 무너지면서 지나가던 버스를 덮쳤다. 이 사고로 승객 9명이 건물 잔해에 깔려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공사비를 아끼고 공사 기간을 줄이기 위해 건물 상부부터 철거하겠다는 계획서와 달리 건물 중간부터 허문 것이 사고의 1차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하청에 재하청을 거듭하면서 철거 비용은 1/7 토막이나 났다. 날림공사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고 7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광주 시민들의 상처는 컸다. 반길 리 없는 기자지만 "상처 들추려는 거 아니에요. 다시는 같은 사고가 반복되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온 거예요." 이렇게 호소하면 그래도 몇 분은 마음을 내어주시기도 한다. 긴 출장을 마치고 방송 당일 열심히 후반 작업을 향해 달려가는 오후 무렵, 갑자기 속보가 터졌다. 광주에서 또다시 붕괴사고가 난 거다. 이번엔 서구 화정동이었다. 무려 17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단 뜻이다. 사고 원인 역시 졸속공사였다.


[다시 간다], 이 코너의 존재 가치를 알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7개월 전을 떠올리게 하는 판박이 사고가 첫 방송 만에 내가 다시 가야 하는 이유를 알게해 준 셈이다. 붕괴된 현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몇 시간 동안 이어지는 실종자 수색작업으로 온 세상이 분주했다. 기분이 묘했다기보다는 화가 났다. 돈과 시간을 좇다보니 아직도 날림공사가 가능했던 거다. 버젓이 부실시공을 하고 있는 현실이 참담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사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라는 데 있다. 


스마트워치를 차고도 비극적 결말에 이르는 사건을 다시 갔다. 내가 이 코너를 맡고서 취재한 16번 째 사고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방송 전날 똑같은 사고가 발생한 거다. 피해 여성이 스마트워치로 SOS를 요청했지만 경찰이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속상함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도 끝이 아니었다. 그 뒤에 다시 갔던 환기구 추락, 패러글라이딩 추락, 판스프링 교통사고도 마찬가지. 방송일을 기점으로 유사 사고가 연일 터졌다. 사고 이후 대책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죄다 기존 사고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이게 [다시 간다]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일까.


가장 최근엔 곡성 산사태 사고를 다시 다녀왔다. 지난 2020년 8월 전라도 일대를 덮친 기록적인 폭우로 곡성의 한 마을에서만 주민 5명이 숨진 안타까운 사고였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민들의 피해 보상은커녕 사고 책임자들이 재판에 넘겨지지도 못했다. 아직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다. 


화나고 원통하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단어도 적절하지 않아요.
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요? 


산사태로 장인과 장모를 한꺼번에 잃은 사위가 내게 했던 말이다. 절절한 유족들의 호소가 귀에 맴돈다. 기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기사로 수사에 속도가 붙기만을 바랄 뿐이다. 또 탁상공론이 아니라 진짜 현장에 필요한 산사태방지책이 나오길 바랐다. 그리고 이 기사가 나간 날 서울과 수도권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12명이 사망하고 7명이 실종됐다. 또 기시감이 들었다. 마음이 아프다. 별 수 없다. 오늘도 나는 다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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