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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an 07. 2023

마음을 약처럼 먹어야 살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이 부족해서겠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한 인간의 육체를 지탱하는 것이 밥이라면 정신을 북돋우는 것은 인정이다.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저 '나는 네가 욕망할(인정할)만 한 사람인가?' 저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삶은 지독히 외로운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가 최소한의 인정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거대한 상실감이 '우울'을 불러온다. 그러고는 마지막 '수용'의 단계가 온다. '감정의 공백기'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텅 빈 마음의 상태."


신형철, <인생의 역사>


우울한 새해. 아주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서 10시 전에 사무실에 가는 것. 일반적인 회사원에게는 아주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10시까지 출근하는 게 새해 목표라니. 하지만 IT 업계에서 재택근무와 자율 출퇴근제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회의도 없는 오전 시간에 추위를 뚫고 사무실로 나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게다가 출근하면 사무실은 텅 비어있다.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은 없다지만, 나는 우리 회사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조직 차원에서 우선순위가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법적으로 반드시 갖춰야 하는 요건이 있는 것도 아닌 일. 여러 부서에서 대체할 수 있는 일.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없어도 그만인 일.


이런저런 일을 시도해 보았지만, 내 부족한 역량과 여러 이해관계로 일하기 쉽지 않은 환경까지 더해지니 자꾸만 힘이 빠진다. 이번 회사에서는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꿈꾸긴 했다만, 이렇게까지 to-do list가 모호하게 텅 빌 것은 또 뭐람. 그래도 이왕 월급 받는 거 회사에 도움 되는 사람이고 싶고, 1인분의 몫은 해내고 싶은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회장실 앞에 책상이 빠진 것이 아닌데도, 요즘 출근하는 마음은 딱 그런 마음이다. 의지를 다지고, 마음을 고쳐 먹어봐도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곳.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내 인생에서 너무 중요한 부분인 곳. 나는 회사에서의 내가, 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잘 지내고 싶다.


책상 위에 예쁜 화분을 두어보기도 하고, 동료와 즐거운 티타임을 갖기도 하고, 예쁘게 차려입고 집을 나서봐도 결국 일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일이 제대로 굴러가야 한다는 걸 매일 느낀다. 마음을 약처럼 챙겨 먹고 힘을 쥐어짜서 회사에 가봐도 내 자리가, 내 회사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쓸모없는 존재로 하루에 9시간씩 부유하는 기분은 너무나 괴로우니까.


그래도 다음주에도 꼬박꼬박 마음을 챙겨 먹으며, 출근부터 해볼 거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상황을 수용해버리기에는 나는 아직 너무 젊으니까. 매일 얼굴을 보며 부대끼고 시간을 들여 하나씩 하다 보면, 불처럼 뜨거운 사랑은 아니어도 은은하게 정이 들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힘을 내 부족한 사랑을 채워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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