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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Nov 19. 2015

중독, 후유증 그리고 카오스

20대 어느 날의 일기


2009년, 20대 어느 가을날의 일기



얼마 전 몸이 좀 안 좋아서 내시경을 했다. 말로만 들었는데 막상 내가 하려니까 조금 무섭더라. 무통이 안된다고 일반으로 내시경을 하기로 하고는 하얀색 콧물(??) 같은 액체를 마시고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근데 와, 그렇게 커다란 호수가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데 '웩! 웩!' 거리고 숨도 잘 안 쉬어지고 단 몇 분 만에 끝나긴 했지만 참 힘들더라, 그거. 그리고는 집에 가서 소감 발표를 했다. 그거 그리 아프진 않은데, 두 번 할 껀 아니더라고.
그랬더니 엄마가 이런다. 그래도 또 해야 될 때가 오면 다시 할 수 있게 된다고. 아이를 해산한 엄마가 다시는 임신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해도 또다시 아이를 가지고 그런 거라고. 사람은 원래 아픈 기억은 빨리 잊는다고.

그냥 그때의 그 말. 괜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세상에 있는 그 당연한 이치들이 때로는 참 슬프다, 나는. 그토록 사랑하는 연인들이 헤어지고는 그 사람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처럼 굴다가도, 그래서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지 않을 거라고 굳은 마음 먹고서도 이내, 아니 그게 몇 년이 걸리더라도 무튼, 시간이 흘러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사랑에 적응하고 또 그 사랑에 빠져든 채 옛사랑은 기억 속에 고스란히 묻어두는. 참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잊혀진다는 그 사실이 조금은 슬퍼졌다. (물론 새로운 사랑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하지만 더 슬픈 건 나 또한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당당하게 소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아 둘 수 없으니까. 흘러가야만 하는 것은 당연히 흘려보내야 하니까.

어려서부터 '당연히 좋은 것',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에 대해 어떤 반항심이 있었던 것 같다. 누가 좋다 그러면 괜한 반항심에 좋지 않은 이유를 열심히 만들어 냈다. 당연히 피아노를 쳐서 교회 반주를 해야 한다는 부모님 말씀에 그때부터 피아노를 싫어했다. 당연히 좋은 학교라고 거기 가야만 좋을 거라는 어른들의 말에 난 절대 그 학교에 진학하기 싫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 그 당연한 것에 대한 나의 소심한 복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정말 인정하기 싫은 것에 인정해야 할 때가 온다는 걸 알았다. 학업이든, 사랑이든, 일이든.
아직 세상을 다 이해하고 깨닫기엔 나는 너무나 철부지 꼬맹이인 것만 같다. 당연한 사실 중에 하나. 시간이 지나면 잊어야 하는 건 잊혀진다는 그 당연한 사실. 그래. 아픈 기억을 빨리 잊을 수 있기 때문에 나 또한 지금처럼 하하호호 웃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끔 한 번씩 생각해본다. 무언가 지나가는 것들은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것들이라면 지나가게 마련이지만 난 아직 내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들이 조금은... 슬프다.






낡은 일기장에 적어둔 그시절 이야기를 읽어볼 때면 뭔가 간질간질하면서 풋풋한 그때의 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지금 읽어보면 괜히 손발 오글거리는 문장들. 하지만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때의 그 감성들이 있다. 너무 혼란스러웠던 감정에 온 마음을 다해 꾹꾹 눌러 썼던 이날의 일기는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들어가 펼쳐보고는 한다.

사람은 아픈 기억은 빨리 잊는다는 엄마의 말에 깊은 생각에 잠겼던 그때 그 시간들. 사랑에 울고 힘들어했던, 그런 중독과 후유증, 카오스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난 아마 그때보다 조금은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일기의 제목은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13화 주제였어요. 드라마에 나왔던 시 한편 소개하고는 글 마무리하고 싶네요.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돌아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 <뼈아픈 후회>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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