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환경과 조기노화: 지체장애인, 발달장애인, 발달장애인 부모 연구
<사회적 환경과 조기노화: 지체장애인, 발달장애인, 발달장애인 부모 연구>
영문명: DiSEPA (Disability, Social Environment, and Premature Aging) Study
2023년 1월 1일부터 한국의 지체장애인 1000명, 발달장애인 1000명, 발달장애인의 부모 1000명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과 조기노화를 포함한 건강을 20년 동안 추적 관찰하는 연구를 서울대 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연구실(PI:김승섭)에서 시작합니다. 심층 인터뷰 기반 질적 연구, 국가간 비교를 포함한 정책 연구, 설문조사와 건강보험 데이터를 포함한 역학 연구, 텔로미어와 후성유전학적 그리고 생리학적 지표 등의 바이오마커 측정을 결합한 프로젝트입니다.
저는 의학과 역학, 통계를 공부한 보건학자이지만, 연구 집단과 사회적 조건에 따라 여러 학술적 도구를 활용해 연구를 진행해왔습니다. 트라우마 생존자인 천안함 생존장병과 세월호 생존학생을 만날 때는 심층 인터뷰를 포함한 질적 연구를 진행했고, 야간노동을 하는 콜센터 노동자를 연구할 때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Cortisol)을 측정하는 생체지표 연구를 했습니다. 성소수자와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소방공무원을 연구할 때는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그 데이터를 분석하는 역학 연구를 진행했고, 교도소 재소자의 건강불평등을 연구할 때는 건강보험 행정 데이터를 이용해 비교했습니다. 여성 노동자가 구직과정에서 경험했지만 말하지 못한 차별 경험의 의미를 추정할 때는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통계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보건학은 예방할 수 있는 질병과 죽음을 줄이기 위한 학술적 근거를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방법론도 차용할 수 있는 응용과학입니다. 한국 사회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배우고 이용하려 했습니다. 대학에서 일하게 된 이후에도 종종 다른 교수님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가 가진 연구 도구만으로는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고 무엇보다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보건대학원에서 이학박사를 받고 인문사회계열인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에서 교수로 일하며 공부했던 시간과 서울대 환경보건학과에서 제 실험실(wet lab)을 운영할 수 있는 환경이 합쳐져 DiSEPA(Disability, Social Environment, Premature Aging) 연구를 기획하고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동권을 포함한 장애인의 삶은 거대하고 뜨거운 정치적 화두이지만, 실제 장애인이 어떻게 교육받고 노동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검토하고 그리고 그 부조리한 사회속에서 받는 차별이 어떻게 장애인의 몸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묻는 연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장애인의 삶과 건강을 들여다보는 지식의 생산은 한국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막혀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의 연구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대학은 특허를 만들 수 없고 당장 저명한 국제학술지에 출판하기 어려운 연구를 하는 이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등록 장애인 숫자만으로도 260만명이 넘는 이들의 삶이 그렇게 학계와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한국의 장애인은 전 생애에 걸쳐 차별을 공기처럼 경험하고 있습니다. 2021년 장애통계연보에 따르면 장애인 중 초등학교에 입학하거나 전학하는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한 비율이 40.3%이며, 중학교의 경우 33.0%, 고등학교의 경우 26.0%에 달합니다. 직장생활에서도 임금이나 승진에서 차별을 경험했던 장애인의 비율이 각기 19.4%, 12.4%로 나타납니다. 그 뿐 아니라, 민간보험에 가입하거나 운전면허를 취득할 때, 음식점이나 공연장을 이용하는 과정에서도 장애인은 차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체 등록 장애인의 45%에 해당하는 지체 장애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발달장애, 특히 자폐성 장애인의 삶은 사각지대에 방치된 채 가족에게 돌봄의 부담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자식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그 부모들의 모성애와 부성애를 하염없는 돌봄 노동으로 착취하고있습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에서는 두 달에 한번 꼴로 부모가 발달장애 아이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처참한 비극을 뉴스와 기사를 통해 접하면서도 우리는 손을 놓은 채 그저 지켜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2021년 정부 통계에 따르면 자폐성 장애인 중 40세 이하 인구가 98.9%입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폐성 장애를 가진 장년, 노인 인구가 대거 등장하는 시기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대책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브라이언임팩트 재단으로부터 DiSEPA 프로젝트트의 첫 5년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펀딩을 받는 일이 결정된 이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기쁨보다는 앞으로 감당해야 하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데이터를 분석해 논문을 쓰고 학술적 성과를 내는 일이 걱정되어서가 아닙니다. 그건 제가 꾸준히 해오던, 실은 제가 할 줄 아는 몇 안되는 일 중 하나니까요.
DiSEPA는 제가 연구실에서 실험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고 논문을 출판하면 완결되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저희 연구는 한국 사회가 실험실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지체장애인과 발달장애인 그리고 그 돌봄의 부담을 외롭게 감당하고 있는 부모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과연 우리는 지금 이대로 우리여도 되는지 묻고 변화의 지점을 찾는 연구이지요. 최선을 다해도 과연 필요한 데이터 수집이 가능할 지 확신이 들지 않아 불안합니다. 상처 투성이인 이야기를 찾아가 귀 기울이고 학술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이 걱정스럽습니다. 무엇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선의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터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날지 모르는 갈등과 오해도 두렵습니다.
연구의 추적관찰 기간이 20년인 이유는 제가 대학에서 일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이 그만큼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만나고 공부하고 쓰고 이야기하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2022년 11월 22일 김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