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모임 첫 번째 발제 (서설)
모든 만남에는 때가 있다. 20대 초반의 나였다면 아무것도 마음으로 만나지 못했을 어떤 이야기들이 40대 중반이 된 지금은 모든 장면이 마음을 두드린다. <자객 섭은낭>이나 <화양연화>와 같은 영화가 그러했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빌러비드>와 같은 책이 그러하다. 시간 속에서 삶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같은 콘텐츠를 이전과는 다르게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이 듦에 감사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의 만남도 그러하다. 20여 년 전 그 건조한 추상성으로 인해 만나기를 포기했던 그 문장이 이제는 그 격정과 구체성으로 인해 몇 번을 다시 읽는 대상이 되었다. 3개월 동안, 서설을 5번 읽었다.
이 책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거대한 기획이다. 육체와 정신, 현실과 이데아, 인간과 신과 같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삶을 지배해 온 이원론을 해체한다. 해체의 대상은 기독교적 세계관만이 아니다. 대지에 뿌리박지 않고 저 너머의 세상에 진리나 원칙이나 근본이 있다고 믿는, 그래서 우리가 육체로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의 삶을 비본질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그 모든 사상이 해체의 대상이다.
그런데, 왜 인류는 저 너머의 세계를 창조해 냈는가. 그것은 불합리하고 이해불가하고 누추하고 고통스러운 이 세계의 삶을 견디기 위해서였다. 죽음 이후의 인간이 맞닥뜨린다고 믿었던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현실 너머의 세계를 가정하여 의미를 찾게 해 주던 도구였다. 이번 생은 고통스럽지만, 죽음 이후에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다음 생에는 더 좋은 인연으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은 불가해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을 견디게 했다. 니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함으로 만들었던 그 사상들을 파괴하고 혹은 더 나아가 경멸하고 현생의 삶을 직시하고 온전히 살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류에게 자신이 의탁해 온 가장 안온한 집을 부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라 요구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 거대한 철학적 기획을 소설의 형태로 말한다. 책은 “차라투스트라는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겼으며 그 십 년 동안 지치지 않았다”로 시작한다. 나이 서른에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의 삶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이 그 기독교적 세계관과 맞서고 있음을 명시하며 시작한다. 사람들과 격리된 산 위에서 변화하고 위베멘쉬/초인/Superman이 된 그는 그 ‘깨달음’의 과정을 고통 속에서 보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겼다. 고통과 고행 속에서 성장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산에서 내려가기로 한 이유도 의미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억겁의 고통 속에서 헤매는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어린양들을 안타깝게 여겨서가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나는 내 지혜에 싫증이 나 있으니, 내 지혜를 갈구하는 손들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태양이라는 존재는 그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태양은 자신이 내뿜는 빛을 흡수하는 존재들 없이 태양일 수 있는가, 그런 고립 속에서 태양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태양 “그대는 그대의 빛과 빛의 여정에 싫증을 냈으리라”
산에서 내려가 처음 만난 성자가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라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죽이고 말 것이야.”라고 말하며 인간의 세상에 불을 지르려 하지 말고 고통받는 인간들에게서 “무언가를 덜어내어 함께 짊어 지”고 “적선”을 하라고 말하자, 차라투스트라는 답한다. “아니요. 나는 적선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정도로 나는 가난하지 않아요.”라고 답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삶과 실천은 자기 안에서 넘쳐나는 사랑과 지혜로 인해 그것들을 나누어야 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적선은 필연적으로 내가 한 행위를 상대방이 고마워하기를 바라게 된다. 상대방이 나의 행동에 대해 감사하다고 느끼고 내게 그 감사함을 표현하기를 바란다는 측면에서 적선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하는 행동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가난하지 않다.
칸트를 비롯한 숱한 철학자들과 달리 니체가 자신의 철학적 기획을 이처럼 온갖 비유속에서 소설의 형태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는 이 책을 만나고 경험해야 한다. 이 책의 글은 이해되기보다는 체험되어야 하는 글이고, 분석하기보다는 느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니체라는 셰르파의 손을 잡고 자신이 기존에 믿고 있던 세계를 부수고 자신이 이전에 믿었던 가치를 경멸하는 등반과 같다. 그 과정에서 인류 역사의 숱한 상징들이 등장하는데, 그 상징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언급하지 않기에 우리는 니체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서설에 나오는 아슬아슬한 생을 살아가며 위험을 감수하다 죽어버린 줄타기 곡예사의 존재와 그를 뒤에서 압박하다 뛰어넘어 죽게 만든 포센라이서, 곡예사의 시신과 함께 찾아가 만난 노인이 누구인지 우리는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책이 어떤 지점에 서 있고, 어떤 긴장을 세상에 불러일으킬 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를 두고서 포센라이서는 말한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이 도시를 떠나시오. 당신은 너무 많은 미움을 받고 있소. 선한 자와 의로운 자들이 그대를 미워하며, 그대를 자기들의 적이자 자기들을 경멸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소. 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신도들이 그대를 미워하여, 그대를 대중의 위험이라고 부르고 있소…. 그토록 자신을 낮추었기에 오늘은 그대 스스로 목숨을 구한 것이오. 하지만 당장 이 도시를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내일은 내가 그대를, 산 자가 죽은 자를 뛰어넘어버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