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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리어스 Sep 05. 2020

소중한 것, 아끼거나 더 많이 쓰거나

덜 쓰고 간직해야 할까, 아니면 한번이라도 더 써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이 소중하기 때문에 아낀다고 한다. 너무 자주 이야기하면 그 말의 주는 힘이 더욱 진심인 순간에는 잘 전달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생각날 때마다 자주 하려 노력한다고 한다. 그 말은 해도 해도 좋은 말이기 때문에, 살아생전 더 많이 쓰고 싶다고 한다.








'아끼다 뭐 되었다'는 속담을 뼛속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은 내가 철없던 응석받이 초등학생 때.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포켓몬스터 줄 노트 묶음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얇은 비닐로 쫀쫀하게 포장된 노트 묶음의 맨 위에서 얼굴 마담처럼 번쩍거리던 피카츄 금색 노트가 기억이 난다(캐릭터 굿즈를 만드는 지금은 그것이 물론 진짜 금은 아니고 '금분 인쇄'란 것을 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예쁘고 소중하고 아까워 내 책꽂이 끄트머리에 잘 꽂아 놓고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노트가 광채를 픽 잃은 채로, 또 한 장도 아닌 모든 페이지에 빽빽이 알 수 없는 메모가 가득 채워진 채로 엄마 책상에 턱 하니 놓여 있었다. 아마 그날 엄마에게 갖은 원망을 다 하고 자지러져라 엉엉 울었던 것 같다. '이 분노를 잊지 않겠어' 하며 엄마에게 늘 그랬듯 바락바락 대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노트가 기울었던 형편에 아빠 일을 돕기 위해 사람들의 리스트를 정리했던 것이라는 것을 안다. 20년이 지난 지금 엄마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우아하고 너무 미안한 얼굴로 "어머, 그랬니. 엄마가 너무 미안하네. 엄마가 그걸 왜 썼을까?”라고 말했다. 난 웃자고 한 이야기인데... 그게 언젯적인데 싶어 마음속에서 주책맞게 눈물이 찔끔 났다.




포켓몬 북과 왼편의 사촌 두 명. 이들은 모두 디자이너가 되어 버리고 마는데... , 1999




반대로 소중해서 더 빨리 자주자주 써댄 것들도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샤프심을 일주일에 몇 통씩 살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학교에서 내 책상 위엔 그림 오다(Order)가 들어온 스프링 노트가 순서대로 너덧 권쯤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즐거이 처리하고 하교해서 복사 용지 한 뭉텅이를 꺼내 배 깔고 그림 그리는 것이 나의 세계이자 일상이었다. 중학교 2학년쯤 되어서는 좋아하는 만화가 생겼는데, 아빠가 방산 시장에 데려가 컬러 마카를 사 주신 후로는 고급 만화 용지를 아끼지도 않고 만화 주인공들을 그려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빠에게 척척 그림을 넘기면, 아빠는 문방구에서 한 장씩 코팅을 해다가 내 방 벽에 착착 열 맞추어 붙여 주셨다.




중고등학생 시절 흑역사 모습은 그림으로 대체한다, 2017




그런데 중3이던 어느 날은 나도 '타블렛'이라는 게  갑자기 필요해졌다. 찾아보니 중고 타블렛이 정가의 반 값 정도에 판매되고 있었다. 아빠에게 무언가를 '사주세요' 하고 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정도로 절실했다. 그렇게 구매한 그 타블렛을 가지고 열렬히 일러스트를 그리던 중고생 시절을 지나, 대학생 때인 데이 바이 귤 작가 시절을 거쳐, 포트폴리오를 만들던 인턴 시절 모두를 보냈다. 주변 디자이너들에게 말하면 잘 믿지 않았다. '10년도 더 된 심 그대로 아직도 쓴다고?' '강철로 잘못 출고된 것 아니야?' 하하 웃었지만 내게는 내 자식처럼 자랑스러웠다. 아무튼 슬프게도 그 타블렛 '펜'은 재작년 겨울 즈음 운명을 달리했다. 통 작동이 되지 않아 당황했는데, 단종된 지 오래된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중고매물로 나온 같은 펜이 다행히 있어 냉큼 구매했다. 자주 써도 너무 자주 써버린 1세대 그 친구는 현관문에 훈장처럼 달아 두었다.




이전에 살던 곳에 꾸며두었던 현관문 사진. 우측에 흘러내린 타블렛 펜이 보인다, 2019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듯이, 가끔은 소중한 것들을 내가 어떻게 대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만지면 부서질까 건드리고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닳고 닳을 때까지 쓰다듬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보기만 해도 황홀한 금색 노트일 수도 있고, 손이 닿으면 컴퓨터에 마법처럼 그림을 그려주는 타블렛 펜일 수도 있고, 당신 옆에서 무심히 휴대폰을 하지만 실은 당신이 참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내일 먹을까 오늘 먹을까 고민하게 하는 냉장고 속 고급 디저트일 수도 있다. 


소중한 것들에 대해 오늘 내가  선택들이 괜찮았기를 바라면서. 내일 하게  선택들이 오늘보다 조금  낫기를 바라면서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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