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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Oct 25. 2021

식어버린 칼국수 먹듯

퇴사를 고민하는 마음

내일 1차 마감인 기사의 초고를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가 허기가 져서 집을 나섰다. 허기라고 느꼈지만 사실은 쓸수록 막막한 글에 대한 답답함인 것도 같았다. 엘리베이터로 25층을 내려와 출입구를 나서자 10월의 마지막 주 어느 정오의 햇살이 아낌없이 쏟아진다. 날이 선 내 마음에게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것만 같은 자애로운 따사로움이다.   


허기진 것치고는 먹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걷다가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먹기로 했다. 대학가의 후문으로 이어지는 길로 한 블록 올라갔다.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믿을만한 맛 집으로 소문이 나 있는 칼국수 집 앞을 지나쳤다. 점심때라 사람이 가득 차 있는 홀의 모습이 상호가 박혀 있는 유리문 사이로 보였다.      


‘그냥 다른 데 갈까...?’ 잠깐 고민했다. 뾰족하게 떠오르는 것도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은 거의 만석이다. 막 나온 돌솥비빔밥이 지지직거리는 소리, 후루룩 국수를 당기고 젓가락으로 그릇을 건드리는 소리, 식사를 앞에 두고 길어지는 업무 이야기, 단체로 좌식 테이블 2개를 가득 차지하고 막 나온 메뉴에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는 여학생들의 소란함이 생각보다 좋아서 없던 식욕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재난지원금에서부터 누리호 발사까지 온갖 화제를 넘나드는 그녀들의 수다를 귀동냥하며 역광으로 잘 보이지 않는 홀의 사람들을 가끔 눈으로 훑으며 토요일의 대화를 떠올렸다. 점심으로 아이가 요청한 떡볶이를 만들어 먹던 중이었다. 아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 내년에 회사 가지 마.”

가끔 아이와 나누던 대화라 별생각 없이 되받아쳤다.

“엄마, 진짜 가지 말까?”

“응, 진짜 가지 말라니까.”  

   

우리의 대화를 들으면서 남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신혼 초, 업무량과 사람 때문에 힘겨워하던 내게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둬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그는 언젠가부터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그의 재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인생을 일궈갈 배우자로서 충분히 논의를 해 봐야 할 문제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휴직과 동시에 줄곧 고민해 왔던 문제였기에 말이 나온 김에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빠는 엄마 회사 그만두는 거 생각이 다른가 봐.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그제야 그는 당황해하면서 서둘러 말했다.

“아니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는 거지.”     


그의 말을 듣고 내심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의 무게가 더 커진 느낌이 들었다. 그간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선택을 미뤄왔지만 이제 결정은 오롯이 내 몫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내게로 온전히 와 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서둘러 결정할 일은 아니기에 상황을 보면서 천천히 고민하기로 했지만 본격적인 내 생각을 남편에게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인 만큼 조금 더 퇴사의 마음에 다가선 기분이 들었다.

     

홀의 사람들을 다시 한번 훑다가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주어진 것들 대신 내가 선택한 것들로 다시 차곡차곡 채워가는 삶을 상상하자 마음이 땅에서 조금 떠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런 날들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은 퇴사 이후의 삶에도 분명 곳곳에서 튀어나와 나를 뒤흔들어 댈 것이고, 붕 떠올랐던 내 몸을 억지로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내팽겨 칠지도 모른다. 어쩌면 ‘괜히 퇴사했어. 조금 더 버텨볼걸.’ 후회하며 질질 짜는 내게 남편은 늘 그렇듯 말없이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날의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아직은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걸 보니 아직 퇴사는 막연한 꿈속의 일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주문해 둔 들깨 칼국수가 식어버렸다. 늘 허겁지겁 먹느라 혀를 데고 며칠 고생하곤 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식으면서 조금 짠 느낌도 들지만 적당히 식어서 천천히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퇴사 문제도 그렇게 한 숨 식혀 천천히 두고 생각해 보자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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