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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Nov 02. 2021

10월의 마지막 밤

아름다운 한 계절을 보내는 마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11월 하고도 이틀째다. 노래의 힘인지 몰라도 매년 10월 마지막 날이 되면 괜스레 마음이 들뜨며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한 해 열두 달 매월 마지막 날이 있지만 왠지 특별하게 느껴지는 한 달의 마지막은 10월과 12월이 아닐까? 12월의 마지막은 새로운 해가 다가온다는 것 때문에 아쉬움보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 맞게 되는 반면, 10월은 또 한 시절이 이렇게 지나간다는 것,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애틋함으로 괜히 먹먹해지고 술잔을 기울이게 만드는 그런 마지막 날이다.    

        

사실 10월의 마지막 날을 의미 있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직장의 선배이자 상사인 여계장 님 덕분이다. 예전 부서에서 전우애를 다지며 가깝게 지냈고 현재 못난이 모임의 멤버이기도 한 계장님은 늘 10월의 마지막 날만 되면 ‘한 잔’을 외치셨다. 아마 휴직 상태가 아니고 주말이 아니었다면 계장님과 다른 분들과 번개모임으로 술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계장님에게도 분명 노래거나 사람이거나 어떤 특별한 추억이 10월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보내고 싶게 만들지 않았을까?      


10월의 초, 지난 못난이 모임 하면서 그중 다른 계장님이 10월의 마지막 날 멋진 이벤트로 우리를 초대하겠다는 말을 했었다. 사실 나는 계장님의 말이 성사될 거라고 믿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그날이 일요일인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까닭이 컸다. 만약 모임이 있었다고 해도 나는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기도 했다. 그날의 분위기와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지난 세월, 우리들 사이의 소소한 이벤트가 사람 좋은 계장님에게 순간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10월의 마지막 날, 결국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가 핼러윈 데이를 맞아 집 근처 분장학원에 원데이 분장 체험을 하러 간 사이, 남편과 집에서 조금 떨어진 스포츠 파크에서 장롱면허 탈출을 위한 운전연습을 했다. 액셀과 브레이크의 감각을 익히면서 깜빡이를 넣어가며 코너를 팔다리가 아플 정도로 여러 번 돌았다. 매일 오가는 놀이터와 학교 가는 길에서도 가을을 한껏 느꼈는데 그곳의 가로수에는 가을이 제대로 당도해 있었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낙엽이 떨어지는 가운데 성사되지 않은 약속을 잠시 떠올렸다.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늘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도 더 많은 것을 내어주려고 무리하는 편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어버린 많은 다짐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내가 많은 것들을 내려놓거나 포기하고 지키려고 애쓴 그 일들이 사실 상대방에게는 그리 대단한 의미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자주 상처를 입으면서도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왔다.    

  

너무 힘들어서 그 마음을 조금씩 놓아버린 후에는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것이라도 함부로 약속하거나 다짐하지 않게 되었다. 그 시절부터 나의 인간관계는 새롭게 확장되기보다는 늘 과거의 안전하고 손해 보지 않는, 손해를 봐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오랜 인연들로만 한정되었다. 그것이 성장인 것인지 살아가는 요령이 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 마음이 편해진 것을 보면 괜찮은 방향으로 바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 때문에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분위기에 취해 너무 많은 것들을 약속하고 자신하는 사람들을 보면 실없이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신뢰감이 안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기대를 하고 그 일에 무게를 싣는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나니, 그 순간의 진실만으로도 충분한 그 사람의 마음을 가늠하게 되었다. 그냥 던져지는 약속이라도 어떤가? 그렇게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때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따뜻한 일이다.   

   

계장님과 나머지 못난이 모임 멤버들은 10월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불발된 모임을 전혀 아쉬워하지 않고 운전연습을 마치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집 근처 꼬지 집에서 남편과 맥주를 마셨다. 요즘 한창 고민인 문제를 이야기 나누고, 꼬지와 맥주를 열심히 먹고 마셨다. 아직은 완전히 추워지지 않아서 야외에 앉아 마시는 생맥주는 맛있었다. 곧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 밀려나겠지만 아주 잠시 동안만은 이 계절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다고 생각한 10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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