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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눈보 Nov 02. 2022

첫사랑과 성장통, 어른과 소년의 경계에서

[영화감상]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3.22.개봉작)

1983년 이탈리아의 시골마을의 여름. 여름이 지나가길 바라는 엘리오는 교수인 아버지의 보조연구원 올리버와 6주간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깊은 끌림을 느끼며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게 된다. 여자 친구가 있는 엘리오는 잠시 여자 친구를 도피처 삼아 보지만 머릿속엔 올리버뿐이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결국 사랑을 인정하고 깊은 관계로 빠지게 된다.

17살 소년 엘리오를 연기한 티모시샬라메와 올리버를 연기한 아미 해머는 긴 대사 없이도 장면 장면마다 여백을 남기며 깊은 여운을 주는 연기를 보여준다. 방황하는 눈빛과 날 선 감정선, 떨림, 깊은 한숨들을 통해 함께 있는 장면에서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티모시샬라메의 소년미 가득한 얼굴과 마른 체형이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서서 혼란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을 더 극대화해주는 듯하다.

왠지 퀴어 영화라고 하면 당연히 예상되는 부모의 반대, 여자 친구의 배신감에 찬 악담을 퍼붓는 장면들이 나와야 할 것 같지만 이 영화는 그와 반대다. 아들 엘리오와 올리버가 서로 특별한 우정, 그 이상을 나누는 것을 알지만 그 마음을 응원해주는 부모님. 엘리오에게 친구로서 평생 사랑하겠다며 따뜻한 포옹을 해주는 여자 친구. 어쩌면 이런 장치들이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을 처음 사랑하며 겪은 미숙함, 그 거침 속에서 받은 상처와 성 정체성에 대한 갈등. 올리버와 헤어진 후 슬픔에 잠식되어 있는 엘리오에게 그의 아버지는 말한다. 너무 많은 감정들을 느끼다 보면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라고. 우정보다 더 특별했던 그 감정을. 난관을 빨리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를 망치는 일이니,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지 충분히 느끼고 잘 흘려보내라며 아버지는 엘리오에게 조언한다.

영화에서는 소년이 겪은 첫사랑에 대해 어떠한 것도 규정하지 않는 듯하다. 사랑을 떠나보내고 그 사람을 그리워 하지만 사랑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처럼 자신의 감정을 충실하게 들여다보는 엘리오를 보여주며 영화가 막을 내린다.

빨리 치유되기 위해 자신을 너무 많이 망친다는 말이 와닿았다. 감정은 좋고 나쁨의 영역이 아니라 그 자체일 뿐이다. 때문에 힘든 감정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하거나 기쁜 감정으로 치환되지 않음을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힘든 시절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면 결국 더 큰 파도가 되어 미래의 나를 집어삼킬 수도 있을 테니.


우린 빨리 치유되려고 자신을 너무 많이 망쳐. 그러다가 30살쯤 되면 파산하는 거지. 그러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줄 것이 점점 줄어든단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만들다니 그런 낭비가 어디 있니? 어떤 삶을 살든 그건 네 마음이다. 다만 이것만 기억해. 우리 몸과 마음은 단 한 번만 주어진 것이고 너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닳고 닳게 된다는 걸. 몸 같은 경우에는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는 때가 와. 근처에라도 와주면 감사할 정도지. 지금은 슬픔과 아픔이 있어. 그걸 없애지 마라. 네가 느꼈던 기쁨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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