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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눈보 Sep 29. 2023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대명제

[독후감]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저, 임경선)

  5개월 전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과로와 스트레스를 과식한 죄로 3일간 병원 신세를 졌었다. 입원 첫날, 빳빳한 환자복을 입고 링거 바늘을 꽂은 어색한 왼쪽 손등을 바라보다 딱딱한 침대에 어색하게 드러누워 보았다. ‘어쩌다 내가 여기 누워 있나..’ 하는 하나 마나 한 생각을 하며 허연색 석고 천장을 텅 빈 눈으로 아무렇게나 바라보았다. 석고 천장에 지렁이처럼 패인 여러 개의 자국을 세다가 지루한 공기를 쓰읍 하고 삼켜봤다.

  주삿바늘을 꽂고 나서야 그토록 갈망했던 고요를 되찾았지만, 시끄럽고 어수선했던 시공간을 벗어 난지 얼마 안 된 탓인지 머릿속은 여러 가지 말들이 뒤섞여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그중 마지막까지 가라앉지 않았던 말은 ‘내가 나 자신을 너무 몰랐구나’였다. 이 정도 나이를 먹고도 나의 정신과 신체의 임계점이 어디쯤 그어져 있는지 모른 채 선을 넘어버리다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늘 ‘나’라는 존재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싶지만, ‘나’라는 존재를 객관화해서 바라보기란 최상급 난이도의 퀴즈 같다. 엄마와 동거했을 시절 엄마는 한참 불 공부에 학구열을 불태우셨었다. 그리고 공부하고 온 날이면 나에게 공부했던 내용을 이야기해주시곤 했다. ‘‘나’ 라는 존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엄마의 말은 방금 들은 게 한국말 맞나 싶은 알쏭달쏭함으로 치환될 뿐이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셀 때쯤이면 이해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 끝에 남는 결론은 ‘나는 본래 없는 존재이다.’일까? 골똘히 생각할수록 답과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라는 책 제목은 늘 내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 자리 잡은 목표와 일치했다. 나의 한계가 어디인지 가늠하고, 나 자신과 조율하며 주어진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주제였다. 나에 대해 잘 모른 채 살아간다는 건 변변찮은 우비 하나 없이 태풍이 몰아치는 바깥으로 매일 외출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곤 했으니까. 과거에 재밌게 읽었던 에세이집 목록 중에 ‘자유로울 것’과 ‘태도에 관하여’가 있다. 이 에세이집을 썼던 임경선 작가의 신작이기도 하다. 책에서는 작가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고찰과 함께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본인에 대한 진솔한 내용이 담겨있다. 읽으며 내내 느꼈던 것은, ‘자신에 대해 아는 만큼 서술하시오.’라고 했을 때 책을 출간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을 적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였다. 나는 한 페이지는 쓸 수 있을까? 아님, 열 줄이라도?

  책의 기둥이 되는 세 가지 주제가 있다. 1. 나이를 잊고 살 수 있을까. 2. 작가로 생존할 수 있을까. 3. 삶의 선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인데, 이 중 재밌게 읽은 첫 번째 질문, ‘나이를 잊고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의 고민에 많은 공감이 갔다.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이 듦은 나이를 의식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은 ‘에이지리스’ 한 상태라고 규정한다.

에이지리스하게 나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꾸준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을 사는 농도가, 나이가 주는 고정관념을 희석시킬 정도로 충분히 진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그 나이의 여자나 남자에 대해 우리가 지닌 선입견으로 그 사람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이나 매력으로 설명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부분이 나이보다 먼저 명징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 구간을 읽으며 문득 떠올랐다. 김대호 아나운서가 ‘오느른’이라는 유튜브 채널에 나와 인터뷰하던 편을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내 기억으론 인터뷰의 공식 질문이 ‘좋은 어른이란?’이었는데, 그에 대한 답이 ‘나는 어른이 아니다. 나는 나다. 내가 나이를 먹어 40살이 됐을 뿐이다.’였다. 그런 답이 어딨냐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만, 난 그 대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에이지리스를 실천하는 사람 같아서. 그리고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대답에 갈피가 꽂혔다.

  사람은 존재하는 한 시간의 중력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늙어가며 사회가 규정한 ‘어른’이라는 이름표와 역할을 동시에 부여받게 된다. 그러면서 ‘어른답게 행동해’라고 눈치 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이런 행동은 왠지 어른스러워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라는 자기 검열에 종종 빠지게 된다. 그러다 진지해지고, 더 진지하게 되면 심각해져 버리곤 한다. 나를 잘 알고 나답게 살아간다는 건 사회적 역할의 어른 그 이상을 넘어 자기만의 고유한 색이 빛바래지 않도록 지켜 내는 힘이다. 나아가 본인의 색을 지켜 낼 줄 아는 만큼 상대방의 색도 존중해 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이 듦에 대한 대답은 ‘관용’이다. 다양한 경험들이 쌓여가는 만큼 내 옳고 그름의 범주 바깥의 영역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럴 수도 있지.’,‘사정이 있겠지.’하는 포용의 문장으로 종결되길 늘 소망한다. 그런 초연한 마음가짐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빠지더라도 날 익사시키지 않을 구명조끼 같이 느껴진다.

  익사 됐을 뻔했던 지난날이 오버랩되는 지금, 나의 영원할 물음표인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라는 질문에 앞으로도 성실히 답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래야 병원 석고 장에 패인 지렁이 문양을 하나둘 세는 일이 적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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