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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눈보 Sep 28. 2024

타인의 눈물의 중력을 헤아리게 되는 순간

[독후감] 법정의 얼굴들(저, 박주영)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 엎드려 울 수밖에 없었다. 
신철규, 눈물의 중력 中 -     

  ‘법정의 얼굴들’을 완독 후에도 밑줄 친 흔적들을 여러 날 뒤적였다. 그 밑줄을 자주 들여다본 여러 날 동안, 깊은 우울증을 앓으며 매시 매초 죽음을 고민하는 친구의 손을 행여라도 놓쳐버리진 않을까 전전긍긍했었다. 첫 에피소드인 ‘혼잣말하는 사람들’ 편을 읽어나가는 동안 특히 그랬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행간과 같은 모든 여백이 친구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메워졌다. 친구가 혼잣말하게 될까 봐, 혼잣말하다가 결국 좁고 깊은 곳에 박혀 죽음이라는 결론을 절대 뒤집지 않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러다 행여 차갑게 식어버린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직장 내 성추행, 성희롱 피해자의 가장 최악의 사례로서 친구의 삶이 기록될까 봐 두려웠다. 이렇게 거대한 불안을 매일 밤 이불처럼 덮고 자기 바빴다. 친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아 대화의 말미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묻고 또 되물었다. 친구는 정제되지 않고 어딘가 서툰 나의 답변을 항상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해 주었다.

  친구의 우울 증상이 많이 회복되고 난 후 스스로 이 시기를 되돌아보니, 마치 긴 꿈을 꾼 것만 같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친구의 말들에 달았던 무수한 답변 중 가장 본인을 도왔던 말은 쓸모에 대한 대화였다고 했다.

A: 나는 이제껏 나의 쓸모를 생각하면서 살아왔어. 내가 직장에서 얼마나 쓰임새 있을까,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B: 이제부터는 가장 쓸모없지만 재미있는 것만 찾아서 해봐. 효율이 떨어져도 했을 때 즐거울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 고민해 봐. 바다 거닐다 발견한 조개껍질도 쓸모없어 보이잖아, 근데 귀에다 갖다 대면 바닷소리가 들린다? 바다가 안에 들어있는 기분도 들고, 행복해지잖아. 이렇게 대체로 쓸모없는 것들이 인생을 쓸모 있고 아름답게 해 주거든.

  하지만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본다. 친구의 인생을 구제한 사람은 바로 친구 본인이라고. 스스로의 삶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본인뿐이다. 나는 그저 친구가 하는 말이 혼잣말이 되지 않도록 되물어 주었을 뿐이다. 높은 파고에 휩쓸려 망망대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친구에게 새하얀 부표가 되어 손을 흔들어주었을 뿐이다. ‘여기야, 여기로 오면 돼. 너무 멀리 가지 말아 줘!’라고 꾸준히 외쳤고, 마침내 나의 이야기가 안전하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p.32 자살을 막으려는 수많은 대책과 구호가 난무합니다. 그러나 생을 포기하려 한 이의 깊은 고통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밖에서 보기에 별거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이유들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 듯, 보잘것없는 작은 것들이 또 누군가를 살아 있게 만듭니다. 삶과 죽음은 불가해한 것입니다. 어스름한 미명과 노을이 아름다워서, 누군가 내민 손이 고마워서, 모두가 떠나도 끝까지 곁을 지켜준 사람에게 미안해서, 이 험한 세상에서 지금껏 버텨온 자신이 불쌍하고 대견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중략)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법정의 얼굴들’은 박주영 판사가 실제 판결문에 기초하여 각 사건의 구체적 정보들을 임의로 각색해서 기록한 책이다. 펼쳐지는 다양한 판결문 속에서 삶을 살아가며 가지고 가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 선과 악을 구분 짓는 것이 유의미한 일인지, 각 판결의 주인공들은 어떤 사정을 갖고 있는지 조명하고 있다. ‘나’를 비추는 렌즈 프레임 바깥에 아웃포커싱으로 흐려진 곳에서 존재하는 얼굴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꾸만 알아보고 싶게 한다. 판사가 기록한 사건 기록집 속의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문장이 아닌 피가 돌고 살아 움직이는 한 사람으로서, 지근거리에서 호흡하고 있는 이웃으로서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타인의 눈물이 체액이 아닌 지구만큼의 중력을 갖는 아픔으로 느껴지게 한다.

p.9 어쩌면 삶은, 질문에 답하며 문장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친구의 우울을 같이 견디며 생각했다. 좋은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을 힘이 세진다는 걸. 앞으로도 흘러갈 시간 속에서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가 무수히 바뀌겠지만, 좋은 질문이 가진 힘을 다시금 상기시켜본다. 그래서 오늘은 ‘좋은 사람’의 정의를 헤아리다가 잠이 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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