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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눈보 Mar 29. 2024

건조한 사전 속에 담겨 있는 습기 가득한 에피소드집

[독후감] 아무튼, 사전(저, 홍한별)

  사전이라는 단어는 나에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집을 떠올리게 한다. 집안 형편이 좋았던 시절 아빠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집을 사 와 벽면 가득 책장에 전시물처럼 꽂아두셨다. 당시엔 인터넷 보급 초창기라 사전은 무조건 책자로 된 것을 보았어야 했다. 그 후 가세가 기울며 살던 집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을 때도 부모님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집만큼은 처분하지 않으셨다. 아빠가 엄마에게 결혼기념일로 맞춰준 귀걸이 반지 세트를 몇 번이고 팔고, 작은 집에 어울리지 않는 전축과 같은 부피 큰 가전을 내다 버리실 때도 백과사전은 그대로였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보지도 않는 백과사전 좀 제발 버리자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사전을 지켜내셨다.

  우리 가족의 변화만큼 사전의 모습도 변해갔다. 그러나 습기를 먹고 눅눅해져 두툼한 책 모서리가 구부러지고, 뽀얀 먼지를 뒤집어써도 사전은 묵묵하게 차갑고 낡은 바닥 위에 잘도 버티고 서있었다. 한창 학업에 매진해야 했을 삼 남매의 뒷바라지는커녕 그날 하루 뭘 먹고살아야 하나를 걱정했을 그 시절, 엄마 아빠에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집은 우리 삼 남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대를 손에서 놓지 않았으면 하는 단단한 희망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어떤 물건에 대한 추억의 생김새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아무튼 사전’에서 작가가 건져 올려준 사전에 담긴 아빠와의 추억이 나를 그 시절로 되돌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사전이라는 다소 딱딱하고 건조해 보이는 낱말에서 이렇게 무궁무진한 이면이 펼쳐질 수 있는구나 하는 놀라움이 있다.(아마, 작가의 역량이지 않을까.) 작가가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떼어낼 수 없는 사전과 얽힌 에피소드, 그리고 사전을 대하는 진중한 자세와 직업정신에 대한 존경심이 인다. 읽다 보면 작가가 번역과 상황에 적합한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 고심하는 미간의 주름도 함께 읽힌다.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글자로 바벨탑을 쌓는, 터무니없는 과업’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보다 정확히 사전을 만드는 중노역을 설명할 방도는 없어 보인다.

  우린 어렸을 적 모두 천진난만한 아기공룡 둘리였지만, 어른이 되고 사회의 씁쓸한 뒷면을 겪으며 둘리와 친구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머리가 벗겨진 고길동의 마음을 헤아린다. 어떤 사물을 마주할 때 마냥 유용하다, 예쁘다, 귀엽다의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는 게 아닌, 이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수고에 대해 어느 정도 유추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가끔 철부지처럼 ‘아, 다 모르겠고 힘들어 죽겠다고!’하며 허공에 발차기하고 싶지만, 그것마저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해야 하는 아줌마가 된 지금. ‘거인의 과업에 우리는 그냥 공짜로 올라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라는 책 속의 한 문장을 잊지 않고 싶다. 비단 사전뿐 아니라 모든 것에 고루 적용되는 저 한 문장이 철부지의 마음을 다잡아 줄 것만 같다.

  추신으로, 글이 너무 재밌어서 다른 책을 더 쓰셨는지 찾아봤는데, 없어서 아쉬웠다. 후속작이 나온다면 꼭 읽어보고 싶다. 단어를 많이 알고 잘 활용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의 표현을 조금 더 읽어보고 싶다. 오랜만에 만난 결이 잘 맞는 에세이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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