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북리뷰

[황금 물고기] 황금물고기의 정체성은 무엇이었나

프랑스소설: 르 클레지오, 황금 물고기를 읽고

by 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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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협력 업계에 있다 보니 빈곤의 문제를 넘어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특히 그 땅에서 수년간 지속되고 있는 지난한 분쟁, 국가 간 전쟁, 기후 위기 등으로 인해 난민들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참혹한 상황에서도 많은 아이들이 따뜻한 집과 뛰놀고 배울 수 있는 학교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들의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빨리 이들이 고향 땅을 밟아 마음껏 꿈을 펼쳤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주인공인 라일라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크게 내 가슴을 울리진 않았다. 어릴 적 유괴되어 모로코, 에스파냐, 프랑스, 미국 등의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마침내 고향인 아프리카 땅으로 회귀하여 근원적인 생명력과 순수함을 기반으로 한 정체성을 되찾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크게 공감이 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첫 번째로 '정체성의 정의'다.


이 책에서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라일라의 근원적 정체성으로 두고 있다. 하지만 라일라에게 민족적 정체성만이 전부였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이 책에서 라일라는 보통 난민들과는 다르게 고향에 대한 추억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어릴 적 유괴되어 태어난 곳이 어딘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다고 설명한다. 물론 라일라가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할 순 있겠으나 오히려 이주민이었기에 형성할 수 있었던 그녀의 다채로운 정체성이 그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라일라를 입양하여 길러준 릴라 아스마와 함께 한 삶을 통해 라일라의 또 다른 정체성이 분명 생겼을 텐데, 모호한 경계의 삶에서 피어난 그녀의 다채로운 정체성을 보고 싶었던 것은 내 욕심이었을까.


두 번째로 아쉬운 점은 성장 스토리이다. 사실 라일라의 눈부신 성장 이야기라는 표지의 글귀를 보고 나서 나름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라일라의 성장이 어떤 성장을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물론 이주민으로서 온갖 성추행, 폭행, 가난 등의 여러 고난을 겪고,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라일라가 많이 단단해진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라일라의 심리가 자세히 표현되기보단, 여러 끔찍한 사건들이 반복되어 전시된 느낌이 더 강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수많은 대문호들의 책들을 탐닉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음악에 흠뻑 빠지는 과정에서 라일라가 정신적으로 어떻게 성장해나갔는지 좀 더 자세히 기술해주었다면 그녀의 내면의 성장 스토리가 더욱 크게 와닿았을 것 같다.(감히 노벨 문학상을 받으신 분의 소설을 이렇게 비판해도 되나 싶지만;;ㅎㅎ)


마지막으로 라일라의 삶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따라가는 수동적인 삶의 느낌이 강했다는 점이다. 물론 매순간 역경을 이겨내긴 했으나 마지막에 고향에 가는 배를 탄 것도 라일라가 근원을 찾아 떠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기보다, 어쩌다 보니 배를 탔고, 그 배가 도착한 곳이 그의 고향이었다. 연어처럼 강한 회귀 '본능'보단 그녀의 '의지'가 좀 더 표현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쨌든 라일라의 삶은 정말 쉽지 않았고. 거친 삶을 잘 헤쳐 살아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건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도 모두 라일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들은 부모님이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인지는 알지만 내 의지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나의 민족/국가적 정체성 이외에, 나머지 정체성은 스스로 여러 경험들을 통해 찾아가고 채워가야 할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아직도, 여전히 성장해 나갈 수 있는 황금물고기가 아닐까.




p.132 나는 그의 말에 귀기울였다. 그의 말과 그의 미소를 모두 들이마셨다. 그는 나를 외부세계와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p.138 우리는 젊었다. 돈도 없고 미래도 없었다. 우리는 마리화나를 피웠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지붕과 붉은 하늘과 도시의 웅웅거리는 소음과 해시시와 같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것이었다.


p.142 저면들을 잘 봐, 라일라. 우리를 닮았잖아. 모두들 포로야.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뿌리째 뽑힌 셈이지. 하지만 그래도 저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어. 저들은 멀고 머 과거에 뿌리를 내렸어. 이곳 사람들이 지하도굴에서 살며서 그을음으로 얼굴이 시커메지고 영양실조로 이가 부러지고 하던 그 시절에, 저들은 이미 인간다운 삶을 시작했던 거야.


p.147 라일라야, 너는 아직 어리니까 조금씩 세상을 알아나가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도처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될 테고, 멀리까지 그것들을 찾아 나서게 될 거야.


p.160 그때 문득 나는 왜 그녀가 우리 둘이 서로 닮았으며 둘 다 자신의 육체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뭔가 진정으로 원한 적이 없고 항상 타인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p.175 너무도 느리고 은은한 그 소리는 땅 밑으로 스며들어서 지구 반대편에 이르러 바다 건너의 음악을 깨웠다. 한 곡의 노래, 한 마디의 말과도 같은 그것을 나는 필요로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나는 행복했다. 그 소리는 내게, 지붕 위로 미끄러지고 랄라아스마의 정원으로 흘러들던 무에진의 목소리, 힐랄 고장에 사는 내 조상들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분명 밖에서는 세상이 부산히 움직이고, 지하철과 기차와 자동차와 인간들이 미친 곤충들처럼 달릭, 사람들은 사고 팔고 계산하고 늘리고 곳간에 쌓아놓고 투자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들을 잊었다. 후리야, 파스칼 말리카, 베아트리스와 레이몽, 마리 엘렌, 노노, 마예르 부인, 프로메제아 부인,그 모두를. 모든 것이 빠져나가고 쓸려나가버렸다. 단지 하나의 영상이 눈앞에 떠올라 나를 침잠시킬 뿐이었다. 그것은 세네갈의 커다란 강과 팔레메의 하구, 황투 위로 난 제방, 엘 하즈의 나라였다. 시몬의 음악이 나를 이끄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p.175 그녀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으며, 그녀가 노예처럼 지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p.176 그는 높은 곳에 앉아, 밤이 되어도 빛을 발하며 사막을 가로질러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강을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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