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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옌데 Feb 25. 2022

부자들만을 위한 성역, 브라질 알파빌리

안전을 위해 쌓은 견고한 성벽의 아이러니

  브라질 여행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브라질의 어디를 가야 좀 더 안전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는지를 내게 종종 물어본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안전한 지역'과 '위험한 지역'을 나누는 건 무의미하다. 정 구분을 해야 한다면 '위험한 곳'과 '좀 더 위험한 곳'으로 구분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성인 남성인 나조차도 상파울루에서 사는 동안 5번이나 강도를 당했을 정도로, 브라질에서는 강력범죄가 흔한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평생 범죄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공포를 실감하기가 어렵다. 총구 앞에서 순식간에 다가온 죽음을 목도하는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진짜 공포 말이다.


  브라질의 치안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가 잘 와닿지 않는다면, 비교할 만한 예시를 하나 들 수 있다. 2011년에 중동의 시리아에서 발발한 내전으로 4년간 약 20만 명이 사망했다는 집계 자료가 있다. 그런데 동기간(2011~2015)에 브라질에서 총기로 살해당한 피해자의 수가 시리아 내전에서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을 합한 수보다 더 많았다. 매년 무려 5만 명에서 6만여 명이 총기범죄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놀랍게도 이 시기에 브라질에서는 전쟁은커녕 2014년에는 월드컵까지 개최했었다.


  물론 인구 2억 1천만 명의 브라질과 비교했을 때 시리아의 인구는 10분의 1에 불과하긴 하지만, 내전을 겪는 나라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오랫동안 꾸준하게 나오고 있다는 건 심각한 일이다.


  세계은행의 가장 최근 통계(2018년도)에 따르면 브라질의 살인 발생률은 인구 10만 명당 27명으로, 한국(0.6명)보다 거의 50배나 높았다. 이런 브라질에서 그나마 조금 더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봤자 절대로 우범 지역에 발을 들이지 고, 될 수 있는 대로 해가 지기 전에 귀가하고,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말고 주변을 경계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브라질의 공공장소는 그 어디도 100% 안전한 곳이 없다. 모두에게 열린 장소인 '공공장소(public place)'에서는 그 누구라도 언제든지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예외는 존재한다. 'public'의 반대말인 'private'한 공간을 찾아가면 된다. 철조망이 설치된 높다란 전기 담장과, 중화기로 무장한 사설 경호원들로 둘러싸여 출입이 완벽히 통제되는 구역인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는 브라질에서 가장 'private'한 곳이다.


  한국어로는 '빗장 도시', 또는 '빗장 공동체'라고도 부르는데, 브라질에서는 좀 더 넓은 의미로 경비원이 상주하는 대문이 있는 주거지를 통칭해서 포르투갈어로 'Condominio fechado(꼰도미니우 페샤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출입증을 가진 거주민과 임시 출입 허가를 받은 손님들,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 주로 범죄자의 출입 차단이 그 목적이다.


  브라질에는 아예 도시 전체의 주거지역을 통째로 전기 담장으로 둘러친 곳도 있다. 상파울루 시가지에서 15km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작은 위성도시 '알파빌리(Alphaville)'가 바로 이런 곳이다.



알파빌리 상업 지구의 전경


  알파빌리는 원래 휴렛패커드, 듀퐁 등의 다국적 기업들의 사무실과 그곳의 경영진들의 주택을 유치하려는 목적으로 1974년에 일본계 브라질 건설사가 개발한 지역이었다. 미래도시가 등장하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1958년작 SF 영화 '알파빌'에서 도시의 이름을 따왔다.


  9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부유층의 거주 공간으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무려 1만여 채에 달하는 고급 주택들로 가득 찬 주거단지와 함께 각종 레스토랑, 쇼핑센터, 영화관, 은행, 사립학교, 대학 캠퍼스, 화학연구소가 들어선 상업단지가 조성되었다. 물론 알파빌리의 모든 구역이 전기 담장으로 보호받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거지역 내의 치안은 확실히 보장된다.


알파빌리의 주거지구


  알파빌리 안에는 강과 호수, 숲으로 연결되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주민들이 안전하게 야외에서 피크닉이나 각종 레저를 즐길 수 있으며, 카트 경기장과 방탈출 카페 등의 놀이시설도 있다. 이곳에서는 조깅을 즐기다가 노상강도와 마주칠 일이 없다. 헬리콥터와 방탄차만으로는 완벽하게 보장받지 못하는 안전을 거대한 철책과 사설경비 시스템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상파울루의 위험한 시가지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는 상류층의 수요가 계속 늘어나자, 알파빌리도 꾸준히 구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각 거주 구역들을 0번부터 번호를 매기기 시작해서 지금은 12번 구역까지 개발된 상태다. 물론 알파빌리 외에도 상파울루 근교에는 부자들의 게이티드 커뮤니티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각종 상업시설과 학교, 레저, 편의시설까지 두루 갖춘 대표적인 곳으로 알파빌리가 단연 손꼽힌다.


지금도 계속해서 확장 공사 중인 알파빌리


  언뜻 보면 이렇게 부자들만 모여 사는 동네가 일견 깔끔하고 살기 좋아 보이는 건 사실이다. 특히 브라질 여행을 와본 사람 중에는 이런 부촌이나 잘 정돈된 관광지만 경험해보고는 "브라질이 생각보다 깨끗하고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이던데?" 하고 단정 짓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애초에 이렇게 큰 규모의 게이티드 커뮤니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브라질이 나쁜 치안 때문에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반증이다. 아무리 그 안이 안전하다 해도, 철책 바깥의 세상이 여전히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평생을 담장 안에서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파울루 한인타운 근처에는 크고 작은 파벨라(favela, 빈민촌)들이 있어서 치안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강도에게 빼앗길 위험이 너무 컸던 탓에, 평소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집 근처에 공원이 있어도 행여 범죄의 표적이 될까 걱정되어 조깅이나 산책조차 마음 편히 즐길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한 건 바로 한강공원에서 러닝, 사이클링, 피크닉과 야간 산책을 여한 없이 즐기는 거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나라로 손꼽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성과 노인, 어린이, 장애인 등의 사회적 약자들이 느끼기에는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자국민의 안전을 완벽히 보장해주는 곳이 없기는 하다.) 다만, 밤늦은 시간에도 강도를 만날 걱정 없이 맘 편하게 거리를 걸어 다닌다는 게 이렇게 큰 행복이자 특권이었을 줄은 브라질에서 살아보기 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치안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유지하지 않는다면 이런 특권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지를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한국이 제법 안전한 편이지만, 설혹 경제가 침체되고 양극화가 극대화되거나 마약과 총기 소지가 흔해진다면 범죄율이 치솟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저 위험한 브라질이나 필리핀도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한때 세계에서 손꼽히던 경제선진국들이었으니 말이다.


  오늘날 브라질에서는 수백만 달러를 내고 알파빌리의 고급 주택을 사야만 얻을 수 있는 특혜를 이미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한국사람들은 스스로 더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당연한 듯이 누리고 있는 안전을 소중히 여기고, 앞으로도 계속 지켜나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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