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아침 비가 온다. 다행히 편의점에서 샀던 우산이 사무실에 있었다. 정각 6시에 퇴근이다. PM이 아니라 AM이라는 게 문제다. 나의 퇴근길은 이른 아침 출근을 하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이다. 횡단보도 맞은편에는 파란 스트립의 직원 카드를 목에 걸고 모닝 커피를 든 직장인들이 초록불을 기다리고 있다. 반대 방향으로 건너는 게 괜스레 머쓱해 우산을 더 눌러 쓴다. 운동화를 흠뻑 적신 빗물이 맨홀로 흘러 들어간다. 지하철역에서 슬슬 지상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헤집고 나는 지하로 들어간다.
밀려드는 졸음이 대문을 밀어서 연다. 9시에 다시 나가야 한다. 씻는게 고민이다. 보통 출근하기 전 아침에 씻고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또 씻는다. 그러나 퇴근 후 3시간 있다가 다시 출근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기 전에 씻을 것인지 나가기 전에 씻을 것인지 고민이 된다. 샤워고 뭐고 당장 침대로 뛰어들고 싶지만 잠깐 자고 일어날 건데 조금이라도 푹 자고 싶은 심정에 샤워를 먼저 하기로 한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두면 현정이가 곧 일어나 씻을 때까진 욕실이 훈훈할테니 추위를 잘 타는 현정이에게도 좋다. 따뜻한 물에 늘어진 몸을 버터 마냥 침대에 바른다. 이제 곧 일어나 출근할 현정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스르르 눈을 감는다. 둘이 함께 배낭 여행을 할 때는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 철야 작업으로 점철된 일상에선 서로 얼굴을 보는 시간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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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폰을 확인한다. 조 차장이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전화를 받았다.
네 차장님. ‘넌 내가 아침에 겨우 들어와서 자고 있는 거 알면서 전화질이냐?’
김 팀장, 입면도 캐드파일 어디에 있어요?
아무런 인사도 없이 묻기부터 한다.
네, 프로젝트 공유 폴더에 넣어놨는데요?
어디요? 안 보여.
아니면 CG업체에 넘겨서 웹하드 오늘 날짜 폴더에도 있을 건데요.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어디예요? 어서 와요.
정말 입면도를 찾고 싶어서 전화한 게 아니다. 그냥 자신이 출근했는데 사무실에 내가 없는 게 탐탁지 않은 것이다. 8시 반이다. 침대가 횡하다. 멍하니 앉아있다가 다시 엎드렸다. 베개와 침대 사이에 욕을 뱉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시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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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었다가 놀랐다. 비에 젖었다는 걸 깜박했다.
아 씨!
왼발로 젖어버린 오른쪽 양말 끝을 밟고 벗기는데 잠깐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젖어버린 양말을 빨래통으로 던져 버렸다. 양말을 갈아 신고 나와 신발장을 열어 보았다. 등산화가 보였다. 그래 등산화면 젖은 길도 쩔쩔매지 않겠다. 단단한 밑창에 적당히 푹신한 깔창. 든든하게 발목을 감싸주는 등산화가 지금 의상 스타일과는 상관없이 축축 처지는 날씨에 잘 맞는다. 여행 중에 네팔의 안나푸르나도 함께 올랐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같이 걸었던 등산화다. 낡은 끈을 버리고 새로 교체한 끈이 다시 좀 해졌고 엄지 발가락 부분 실밥이 조금 터진 곳은 구두약으로 잔뜩 발라 메꿔 놓았다. ‘유행 따윈 내 소관이 아닐세’하는 모양의 등산화였지만 저걸 신고 나가면 다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밑창 골에 낀 진흙 정도는 날 것 같았다.
비? 오려면 그래 좀 오라고 해. 괜찮아. 난 하나도 불안하지가 않아. 어서 날 신고 어디든 가.
등산화를 신고 집 밖으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아직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가는 길에 있는 오피스텔 복도를 통과해서 가기로 한다. 비를 잠깐 피해 갈 수도 있고 왠지 큰 길이 아닌 곳으로 통과해가면 지름길로 빨리 가는 기분이 들어서다. 오피스텔에 가까워지는데 앞에 전형적인 직장인 복장의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단정한 남색 면바지에 폴로 티셔츠를 입은 그의 목에는 파란 스트립 끈이 걸려 있었다. 스트립 끝에는 그의 소속과 직급이 성명 앞에 붙어있는 직원카드가 매달려 있을 것이다. 조급한 그의 발걸음을 보자 다시 조차장의 전화가 올 것 만 같았다. 나도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 남자보다 먼저 오피스텔 복도로 들어 서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기랄 그가 먼저 들어갔다.
오피스텔에 들어서면 복도 가운데 조금 넓은 엘리베이터 홀이 나온다. 거기서 그 파란 스트립의 직장인을 앞질러 가려고 마음먹었다. 그가 이 복도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 텐데, 누군가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마음이 의지와 상관없이 중추신경을 자극했다. 더 빨리 걸었다. 엘리베이터 홀에 거의 이르렀다. 그는 보통의 속도로 걸었지만 겨우 바로 뒤까지 다다를 수 있을 뿐, 앞지르지 못했다.
아아아!
복도를 벗어나는 출구가 가까워졌다. 뛰어올라 그의 오른쪽 골반을 발로 냅다 가격했다. 그는 놀랄 겨를도 없이 왼쪽에 있는 은행 출입문에 퉁겨 쓰러졌다. 옆구리를 쳤다면 허리가 꺾이면서 가격한 충격을 조금 흡수했을 테지만, 골반을 타격한 힘은 몸 전체에 전달되었고 그는 은행 출입문에 부딪히고 튕겨 나와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의 머리가 페널티킥 포인트에 축구공이 살포시 얹히듯 내 오른발 앞에 놓였다. 싸커 킥. 그리고 머리를 밟았다. 화강석 마감의 단단한 바닥에 머리는 자신만의 탄성으로 올라오다 목에 붙들려 다시 바닥에 착지했다. 텍스트의 속도는 이미지의 속도와 달라서 제대로 그 장면을 표현할 수 없는데, 아마 영화였다면 1초 스물네 개의 프레임에 그 탄성 운동 2회를 딱 담을 만한 장면이다.
한 번 더 스물넷, 한 번 더 스물넷, 한 번 더 스물넷, 한 번 더 스물넷, 한 번 더 스물넷.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줌 인.
천장 형광등의 플리커 현상 때문에 바닥에 붙은 머리가 깜박깜박 거렸다.
지금 내 일상 또한 어긋난 주파수로 깜박까감박.
한 번 더 스물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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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를 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나의 속도에 맞춰 산을 올랐다. 보통 일주일이면 갔다 오는 트래킹 코스를 3주에 걸쳐 걸었다. 걷다가 경치가 좋은 롯지에서는 며칠을 더 묵기도 했다. 아침에 늦잠으로 안나푸르나 봉우리를 빛내는 일출을 놓쳐서 하루 더 머물렀다. 다음날 날씨가 흐려서 해가 보이지 않으면 또 하루를 더 묵기도 했다. 그러면서 마을의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하루 종일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를 둘러싼 장소가 매순간 변하고 있음을 사진을 찍으며 알았다. 구름이 지나가고 바람이 느껴지고 그림자가 진해지고 옅어졌다. 늘어진 시간에서 감각은 더 조밀하게 경험되었다. 반면 비몽사몽의 출근 시간은 조급하고 감각은 무뎠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떤 공기가 살에 닿는지 느끼지 못하고 마음을 졸이며 매달 대출이자를 갚아 나가듯 잰 걸음으로 회사와의 거리를 줄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히말라야는 사무실보다 훨씬 먼 곳이었고 여행으로 삶의 전체를 채울 수는 없었다.
이미 싸커 킥을 당했을 때 그 머리의 전면은 형체가 많이 일그러졌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그의 얼굴보다 훨씬 단단한 등산화.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된 머리통의 앞면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신분을 즉각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파란 스트립에 매달린 직원카드뿐이다. 붉게 퍼지는 피 위에서 파란 스트립은 상어 모양 아이스바를 한참 핥은 천진한 꼬마의 혓바닥 색깔로 물들었다. 스트립을 따라 짓이겨진 그의 뒤통수로 눈길이 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얼굴을 알 것 같았다. 어쩌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때린 것 같기도 하다. 또 밟았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다.
멈춰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히말라야를 올랐던 등산화가 보인다.
등산화에 묻은 피가 바닥으로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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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잠시만요.
뒤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저 잠깐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고개를 들어 뒤돌아보았다. 나를 부른 그의 인상은 빡빡 깎은 머리에 쌍꺼풀 없는 눈, 성긴 콧수염과 턱수염으로 깔끔해 보이지 않았다. 티베트나 어디 북방 아시아계 승려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콕 여행자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통이 커다란 바지와 물 빠진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의 어깨 부분에는 구멍이 난 곳을 손바느질로 대충 꿰맨 곳이 서너 군데 있었다. 체 게바라의 베레모를 쓴 아인슈타인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였는데, 그 얼굴 밑에는 ‘VIVA LA RELATIVITY’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혼자 저걸 꺼내자니 잘 안되네요.
그는 무슨 힘을 많이 썼는지 온몸이 젖어 있었다. 번들거리는 손이 가리키는 오피스텔 복도로 다시 들어갔다. 조금 전에 짓밟은 인간이 누워 있었다. 누운 상태에서 등이 휘어져 바닥에서 떨어져 있었고 턱이 위를 향하고 있었다. 모든 체액을 다 쏟아낸 것처럼 바닥이 젖어 있었다. 기괴한 광경에 멍한 눈을 떼지 못하고 다가갔다. 앞서간 그 사람이 어서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 위에 섰다. 입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비죽 나와 있었다. 그가 그 검은 덩어리에 붙어있는 고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여기, 여기 잡아봐요.
말없이 그가 눈으로 가리키는 곳을 쥐었다.
당겨요!
그의 팔뚝에서 핏줄이 불거졌다. 서서히 그 검은 덩어리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팔뚝에서 핏줄이 도드라졌다. 뭔가 걸려있던 것이 풀리는 것처럼 툭 나오기 시작했다. 뒤집힌 입술에 붙어있는 어깨끈이 보였다.
이제 그걸 잡으면 되겠네.
잡으려 하자 입이 오므려 들기 시작했다. 검은 덩어리가 다시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덩어리를 잡고 있던 그의 손도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놓치지 않으려 그 안에서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나는 재빨리 누워있는 사람의 가슴팍 위에 올라탔다. 두 어깨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고개를 쳐들었다. 뒷골에 맺힌 땀이 흘러 등골을 간지럽혔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눈앞의 천장이 아득해졌다.
으으으!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본래의 크기를 잃은 입은 이제 입 아니었다. 입이 있던 자리에 생긴 다른 어떤 구멍, 출입구, 안팎을 나눌 수 없는 무한의 기계, 찢어지는 중력. 다시 드러나는 어깨끈을 빡빡머리가 붙잡았다. 검은 덩어리가 다시 서서히 빠져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백팩이었다. 검은 방수 커버가 쓰인 45ℓ정도 되는 여행 배낭이 그 구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이마를 발로 딛고 허리를 폈다. 백팩의 허리끈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자세를 낮추어 허리끈을 붙잡았다. 턱을 밟고 무릎을 폈다.
끄으으윽!
허리끈을 더 잡아당기자 백팩이 완전히 빠져나왔다. 낡은 백팩이었다. 방수 커버는 군데군데 찢어져서 넓은 천 테이프로 때워져 있었다. 남자는 백팩을 바로 세우고 손으로 쓱 쓱 문질러 닦아냈다. 그을린 팔뚝으로 배낭을 들어 올려 어깨끈에 팔을 집어넣었다. 아기를 업듯 툭 한번 몸을 튕겨 등에 백팩을 올리고 재빨리 나머지 어깨에 끈을 꿰찼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한번 지었다.
이제 그거 줘요.
네?
그가 내 발을 가리켰다.
그거요, 등산화. 내 거잖아.
어? 네. 그래요.
엉겁결에 등산화를 벗었다. 그는 등산화를 툭 한번 털고 킁 한번 코를 갖다 대보고는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 자연스럽게 자기 발을 끼워 넣고 다시 끈을 조여 매는 손놀림이 능숙해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맞다.
그가 다시 백팩을 등에서 내렸다. 방수 커버를 반쯤 벗기고 배낭 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카메라였다.
누가 이렇게 무거운 걸 여행할 때 가져갑니까. 여기서 그냥 써요. 한번씩 찍어 봐요.
그는 묵직한 DSLR 카메라를 내게 건넸다. 히말라야에서 까마귀를 찍던 카메라였다. 느린 여행에서는 괜찮은 무게였다.
어느새 그는 복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 따라 나가려는데 경보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경보음이 복도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다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팩이 오피스텔 밖의 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다 맨발이 체액으로 젖은 바닥에 한 번 미끄덩했다. 다시 중심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비는 더 거세졌다. 저 멀리 떠가는 검은 덩어리가 보였다. 실컷 두드려 팼던 남자가 옆으로 왔다. 멀쩡한 모습으로 내게 폰을 건넸다. 보랏빛 스트립에 걸린 직원카드에 설계1팀 팀장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려는 데 손에 쥐고 있던 폰이 계속 울린다. 폰을 바라보았다. 빗물이 한 방울 화면에 떨어졌다. 엄지로 빗물을 닦아내고 통화를 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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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어디야? 다시 출근 했어요?”
현정이다.
오피스텔 안에서 철퍽이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
“잠은 좀 잤어?”
…….
“오빠?”
땀인지 눈물인지가 현정이의 목소리와 함께 눈가를 적셨다.
“어, 이제 일어나야지.”
끈적한 눈에 방문이 일그러져 침대에서 아득히 멀어 보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떴다.
흠뻑 젖은 얼굴이
침대에 파묻힌 코 앞에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서서히 번진 시트의 축축함이 눈가에 미지근하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