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폭력 속의 두 소녀
"Book, once they are witten, have no need of their authors."
-Elena Ferrante
외국 웹을 뒤져도 이렇게 정보가 없는 작가는 처음인 듯합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얼굴 없는 작가로 유명하다더니,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ard of Naple(나폴리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것을 보니, 작가의 나폴리 시리즈가 얼마나 큰 반향을 이끌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뉴욕타임스에서도 2015년 최고의 책 중 하나로 선정했더군요. 게다가 소설의 배경이 된 나폴리를 어떻게 여행할 수 있는지 가이드도 나와있습니다.
나폴리 시리즈는 총 4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소설의 제목은 <My Brillant freind>, <The story of New name>, <Those who Leave and Those who Stay>, <The story of the lost child>입니다.
작가는 폭력과 무지가 만연한 나폴리에서 태어난 두 소녀의 삶을 60년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책은 <나의 눈부신 친구>입니다. 이 책에서는 '레누'와 '릴라'의 유년기와 사춘기가 담겨있습니다. 다른 것보다 어린 나이로서는 정의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대한 표현이 두드러지는 소설입니다. 여러모로 인상 깊은 소설이었습니다.
난 너와 같은 무리를 한 번도 미워해본 적이 없노라.
부정을 일삼는 모든 정령 중에서도
너 같은 익살꾼은 내게 조금도 짐스럽지 않구나.
인간의 활동이란 쉽사리 느슨해지고
언제나 휴식하기를 좋아하니 내 기꺼이 그를 자극하여
악마의 역할을 해낼 동반자를 그에게 붙여주겠노라.
-<파우스트>, 괴테
사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큰 인상은 <데미안>과 같은 느낌이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데미안>이 전복과 반전을 반복한다면, <나의 눈부신 친구>는 그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천천히, 아주 느긋한 호흡으로 순간들을 누적시킵니다. 그런 부분에서 이 소설은 적어도 <데미안>보다 충격적이지는 않아도, 더 편안하게 두 캐릭터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기 쉽습니다.
책의 시작에서 <파우스트>의 인용은, 개인적으로 <데미안>의 아타락시아에 대한 신화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다만 두 구절의 차이점이라면, 아타락시아는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는 묘사를 통해서 '개인의 성찰, 깨달음'을 강조하는 반면에 '악마의 역할을 해낼 동반자'라는 구절을 통해서 '개인'보다 '관계'를 중점에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왜 이런 구절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전반적인 분위기와 어울리는 문구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릴라는 30년 전부터 내게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사라진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신분을 바꾸거나 머나먼 고세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소설은 주인공인 친구인 '릴라'가 사라지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레누'는 그녀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기억이 닿는 한, 나는 4층 정도 높이의 하얀색 건물들과 뜰, 교구, 동네 공원의 범주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를 느껴본 적도 없었다. 들판 너머로는 기차며 자동차, 트럭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녔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나 선생님이나 나 자신에게조차 대체 저 많은 자동차며, 트럭, 기차들은 어떤 도시, 어떤 세계를 향해 가는 것인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릴라도 그때까지는 바깥세상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모든 것을 혼자 계획했다.
우리는 바다로 가야 했는데 가지 못했다. 나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얻어맞았다. 그 과정에서 릴라와 나의 사고방식이 뒤바뀌는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비가 와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나는 익숙했던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처음으로 느껴본 그 거리감은 모든 걱정과 인간관계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다. 반면 릴라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후회했으며 바다를 포기하고 우리 동네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나는 도무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결국 이 상황에서 두 소녀의 선택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놨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느냐,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느냐. 두 선택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사람이 다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에, 다른 선택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두 소녀의 다른 선택은 앞으로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복선'이기 때문에, 이 장면을 선택했습니다.
'레누'는 이상황에서 '릴라'와 사고방식이 뒤바뀐다고 표현했습니다만, '릴라'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배경에서 상황을 주도함으로써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과 실행에 있어서 거침없습니다. '레누'는 미지의 세계 - 자신이 모르는 세계 -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미지로 발을 움직입니다. 다만 그녀에게는 '릴라'와 같은 결단과 실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자문합니다.
주인공인 '레누'의 입장에서 '릴라'는 '데미안'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데미안>과 달리 '레누'는 각성하지도 않고, '릴라'에게 어떤 숭고한 사명 따윈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인간을 초월자를 만드는 것이 작가에겐 불편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두 소녀는 서로에게 원하는 이미지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아직까지 두 소녀에게 '자아'가 형성되기 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인간이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문학이나 대중문화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접근 방식은 두 소녀의 다른 생활환경, 만나는 사람들, 다른 성취를 통해서 심화됩니다. 어쩌면 이 소설을 통해서 사람은 어떻게 완성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 있겠네요.
내 몸이 계속 변해서 어느 순간 절름발이에다 사시인 어머니의 모습이 튀어나올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나를 좋아해주지 않겠지. 시시때때로 눈물이 나왔다. 그러는 사이 단단했던 가슴에 살이 붙고 말랑말랑해졌다. 나는 몸속에서 꿈틀대는 어두운 힘에 사로잡혀 언제나 근심에 차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사춘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몸의 변화와 시대의 변화, 시각의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몸의 변화에 대한 묘사는 재미있었습니다. 성별의 차이를 떠나 몸이 변화한다는 건 사춘기 청소년에게 가장 큰 고민일 테니 말입니다. 저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쳐왔고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엔 이런 개인의 내밀한 변화에 대해서 누구와 상담하거나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몰랐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레누'의 감정이 잘 느껴졌던 거 같습니다.
겨우 열세 살인 우리들은 제도나 법률이나 정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은 것을 따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원래 정의는 폭력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었던 건가. 알프레도 아저씨가 돈 아킬레를 죽인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소설 속에서는 시대 속에서 내면화된 무지와 폭력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아무도 그런 행위가 잘 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갈등의 해결 방식은 언제나 신체적, 물리적 폭력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질서입니다.
이 질서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재미있는 건 지금 현재에 머무르기로 한 릴라의 방법은 아주 급진적이고 개혁적입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있는 레누의 방식은 기존의 질서를 인정하면서 시작합니다. 물론 두 사람은 이 질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두 사람의 전략적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두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기적으로 변해간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타인과 관계일 수 있고, 두 소녀의 대화일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와 나폴리의 변화와 멀지 않다는 점이 더더욱 두 소녀를 유기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않도록 만듭니다.
이런 점에서 근대는 재미있는 시대였던 거 같습니다. 사상과 생각의 변화가 물리적 실체의 변화로 다가오던 시대니 까요. 현대는 배경의 물리적 변화보다 수단과 도구의 발달이 사상과 생각의 발달에 앞서는 생각이 듭니다. 변화가 눈에 띄게 다가오지 않을뿐더러, 변화의 흐름을 수용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변방으로 밀려나니까요. 4-5년 전 기술을 문화 컨덴츠와 결합해낸 '포켓 go'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이미 지난 시대를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기는 간극 또한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세상은 좀 더 '스펙터클'해지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에 대한 필요를 느낍니다. 물론 그런 가치는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실체를 가졌을 때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건 사실입니다. 그건 이미 보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솔라라 형제가 왜 이 동네 주인인 양 행세하고 다니는지 아니?"
"포악한 인간들이니까."
"아니, 돈이 많아서야."
"그래?"
"그럼. 그치들이 언제 피누차에게 치근거린 적이 있니?"
"아니."
"그런데 아다는 왜 그렇게 취급했는지 알아?"
"아니"
"아다는 아버지도 없고 오빠인 안토니오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인 데다가 엄마인 멜리나와 건물 청소나 하고 다니는 신세이기 때문이야."
그들은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과거일 뿐이니 조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그냥 덮어두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직도 과거의 일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까지 그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모두 잊고 다시 잘해보자'는 말이 익숙한 요즘입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냐?'라는 말은 귓등으로 흘러 넘깁니다. '그만큼 보상을 받았는데, 이제 그만하지?'와 같은 폭력적 언사도 존재합니다. 아마 그들은 그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거대한 재난은 보통 그런 식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김훈 씨의 기고처럼 세월호는 '대한민국의 모든 부정과 부패가 곪아 터져버린' 사건입니다. 단순히 그것을 덮고 가기엔, 세월호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와 가치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소설 속의 두 소녀 또한 '이만하면 그만하자'라는 부모님 세대의 자의적 혹은 타의적 타협, 포기, 수용해버린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들 세대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폭력'은 가장 단순하고, 확실하고, 즉각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복수와 같은 증오의 연쇄반응은 결국 누군가의 침묵으로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최선일 순 없지만 말이죠. 하지만 증오의 고리를 끊는 침묵은 사건을 덮기 위한 침묵과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자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만연한 부정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폭력'의 고착화는 이런 방식으로 형성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순간, 유무형의 폭력이 당연하게 자행됩니다. 폭력의 가해자는 그것이 폭력이 아닌,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입니다.
"너 천민이 뭔지 아니?"
"네, 선생님"
천민이 무엇인지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 모두가 천민이었다. 음식과 와인을 둘러싼 다툼, 더 빨리 음식을 제공받고 더 나은 서비스를 해달라고 벌이는 싸움, 웨이터들이 분주히 오가는 더러운 바닥, 시간이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는 저속한 건배사야말로 비천한 것이었다. 포도주에 취해 금속공예품 상인의 음담패설을 진지하게 듣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아버지와 그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는 어머니도 천민이었다.
폭력이 자행되는 순간, 그리고 그 폭력이 굉장히 일상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레누'는 그 모든 것에 '혐오'를 느낍니다. 레누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다만 개인적으로 '혐오'는 너무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혐오'를 넘어서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혐오'에 멈춰버리고 맙니다. 저는 레누의 감정이 혐오를 넘어섰으면 좋겠네요.
"아뇨, 따님의 행복을 위한 일을 하시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내 딸의 행복은 내가 알아."
"네. 하지만 가장 잘 아는 것은 리나 자신이겠죠."
아마 이 책을 읽으신 분이라면, 중간중간 이것보다 더 좋은 장면과 구절이 많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
사실 인용한 구절보다 더 적나라고, 더 섬세하고, 더 충격적인 것도 많았습니다.
결국에 제가 보여드리는 구절은 소설의 단면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 단면에서 제 나름의 사유를 확장시킨 것에 불과하고요.
다른 분들은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읽었을지 궁금하네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작가는 필연적으로 휴머니스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느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한길사 책 중에서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거 같네요.
다른 인문학 서적들도 이렇게 이쁘게 찍어주면 좋을 텐데요...ㅜ
그냥... 개인적인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