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인생에 있어 잊혀지지 않는 장면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 집 두 아이의 탄생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인 나야 고생하는 아내님 옆에서 라마즈 호흡을 따라하며 ‘습습후후’를 외친 것 뿐이지만은, 그 기나긴 시간을 뚫고 조우한 아이들의 신생아 모습은 여전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그랬던 아이들이 어느덧 자라서 큰 아이는 이제 열 살, 둘째는 일곱 살이 되었다. 그간 많은 양육서적을 읽었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조금 더 잘 키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늘 해왔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라도 완벽해질 수는 없는 법, 양육관련 서적이나 조언을 듣다보면 숨이 턱턱 막혀오기 시작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안 그래도 회사 일도 바빠서 평일엔 거의 아이들 자는 모습밖에 보지 못하고, 출장도 잦아 아이들과 함께 있을 시간도 부족했다. 이쯤 되면 집 근처에서 회사를 다니며 매일 저녁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주변 아빠들에 비해 못해주고 있어,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지배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읽게 된 이 책, 주디스 리치 해리스(Judith Rich Harris)라는 어느 재야학자가 쓴 양육가설(The nurture assumption)을 접하게 되었다.
재야학자라고 말하긴 했으나, 해리스 할머니(1938년 생)는 본디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하였다. 비록 박사학위는 받지 못하고, 일신상의 이유로 학업도 이어가지 못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며 메인스트림에서는 밀려났지만, 그는 꾸준히 아동발달에 관한 대학교재를 집필하는 등의 자기만의 연구를 이어나갔다.
이 양육가설이란 책은 1998년에 처음 출간된 책으로,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와 부모의 책임’이라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통렬히 비판하여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센세이션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면 해리스 할머니가 어떠한 증거를 바탕으로 이러한 논리를 이끌어 냈는지 잠시 들여다보자.
(Disclaimer)
이하 가능하면 본문의 인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고, 굳이 인용하는 부분은 큰 따옴표“”를 통해 구분하고, 해당 페이지를 명시하였음을 미리 알려드린다. 이 글이 아무리 장문의 서평이어 많은 것을 함축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나의 의견 혹은 내가 소화한 의견이지 책과는 상이한 내용일 수 있다. 따라서 본 서평을 보고 해당 내용이 궁금하다면 직접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시길 권한다. 부디 맥락이 고려되지 않은 어느 필부의 서평으로 주디스 해리스라는 학자의 생각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흔히 우리는 부모들에게 모든 자녀에게 공평하고 정대하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하는 부모들은 매번 좌절하고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이러한 요구의 기저에는 부모-자녀 효과(Parent-to-Child effect)를 바탕이 되는데, 이는 아이가 달리 행동을 했다면 부모가 그 아이를 다른 형제자매들과 달리 대했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하지만 반대 급부적으로 생각하여 자녀-부모 효과(Child-to-Parent effect)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부모-자녀 효과 관점에서 본다면 “부모가 많이 안아 준 아이는 좋은 성격을 갖게 되고, 맞으며 자란 아이는 나쁜 성격을 가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자녀-부모 효과 관점으로 보자면 “착한 아이는 부모가 많이 안아 주었을 가능성이 높고, 버릇없는 아이들은 맞고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로 해석될 수 있다. (p.70 참조)
솔직히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그다지 많이 읽어 준 부모는 아니다. 나 자신은 그래도 일년에 50-60권의 책을 소화하는 편이고, 늘 손에 책을 놓지 않는 편이지만, 아이들 책을 읽어주면 나도 모르게 잠이 스르륵 와 버린다. 그렇게 졸린 채로 책을 듬성 듬성 읽다보면, 아이들이 이렇게 말을 한다. “아빠! 그래서 공룡이 뭐라고 했는데?!”
사실 나는 책을 읽어준다는 것에 대한 의무감도 그다지 큰 편은 아닌게,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 스티븐 래빗(Steven Levit)의 괴짜경제학 때문이기도 하다. 스티븐 교수에 따르면, 통계적으로 부모가 아이에게 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이의 학업성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보다 집에 책이 많고 적음이 아이들 학업성적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집에 책이 많다는 것은 부모가 그만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집에는 책이 많다 :)
여하튼 저자는 언어와 관련하여서도 부모가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음을 이야기 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아이가 속한 사회의 언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받아들이기 힘든 말일지도 모르지만, 엄밀히 말해 부모는 자녀에게 아무 언어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 (p.125)
부모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민자 가정과 부모가 청각장애인 가정의 예를 들며 설명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4-5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가정해보자. 대부분의 아이들은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식 영어를 능숙히 구사하기 시작하지만, 부모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는 수년 수십년이 지나도 그러한 채로 고정되어, 영어가 편한 아이는 영어로 이야기하고, 모국어가 편한 부모는 모국어로 이야기하는, 이중언어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도 한다.
한편 청각장애인들은 대체로 같은 청각장애인과 결혼하는데, 그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90% 가량은 정상 청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어떤 언어교육도 받지 않지만, 모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어른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즉, 생각보다 부모는 자녀의 언어에 대해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
주디스 해리스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결국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유전적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또래집단(Peer group)의 영향이 후천적으로 한 사람의 성장에 기여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문화가 존재하는데, 아이들은 그 집단 내에서 언어를 습득하고, 행동양식을 따르고, 목표를 찾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바로 친구들과 달라지는 것이다.” (p.127)
“죄수의 목표가 훌륭한 교도관이 되는 것이 아니듯,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훌륭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목표는 훌륭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p.295)
물론 여기서 교도관은 부모를 말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이미 부모라는 어른의 집단과, 자신이 속한 아이들의 집단을 구분해 놓고, 부모가 아무리 이상향을 제시한들, 그것을 자신의 행동과 결부시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교도소에는 죄수와 교도관이란 두 사회적 범주가 존재하며, 교도관은 죄수보다 더 큰 힘을 가지긴 했지만, 죄수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동료 죄수들의 평가라는 말이다.
저자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한다. 예컨대 뚱뚱함과 날씬함의 유전가능성은 0.70 정도의 다소 높은 수치인데, 자녀가 뚱뚱한 것을 유전이 아닌 부모의 잘못된 식습관 교육 및 모범을 보이지 못한 부분 등에서 찾는 것은 다소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상관관계(Correlation)는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 관계가 확실하게 규명될 때 사용되어야 하는 개념이 인과관계(Causation)이다. “상관관계는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없다.” (p.458)
이렇게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돈하기 시작하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부모에게 넘겨버릴 수도 있고, 부모는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역할을 크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다. 저자는 덴마크의 범죄기록을 토대로 ‘범죄 친부모/양부모–범죄 자녀’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 범죄에 있어 유전이 영향을 미치는지 환경이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았는데, 지배적인 종속변수는 범죄자 가정이 아닌 그들이 아이를 키운 ‘지역’에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와 생활방식이나 가치관이 비슷한 이웃이 모여 있는 지역에 거주한다. 이는 상호간에 주고받는 영향 때문이기도 하고, 특히 도시에서는 유유상종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친구나 이웃집의 자녀들과 어울리면서 성장한다. 아이들은 이들과 함께 또래집단을 형성하고 이 또래집단 안에서 사회화된다. 만일 부모가 범죄자라면 친구들의 부모도 범죄자일 수 있다. 아이는 집에서 배운 태도와 행동들을 또래집단 안으로 가져오고, 이런 태도와 행동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면 그 태도와 행동을 집단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유지시킨다.” (p.427)
결국은 무 자르듯이 부모의 영향이냐 또래집단의 영향이냐라고 평가하기 어렵지만, 아이의 성장발달에 있어서 일정 시점 이후로는 아이의 사생활에 있어 부모가 들여다보지 못하는 영역이 생기고, 그것이 그 아이의 성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또래들로부터 배척된다는 것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은 회사를 다니는 지금도 그러하다. 가족이 커버할 수 없는, 그러한 자신만의 인생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아이가 어떠한 집단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면(왕따와 같은 경우), 저자는 아이의 집단을 이동시키는 것이 해결방법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니까 극복하기 어려운 또래집단의 특성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이사를 고려할 만한 또 다른 상황이 있다. 바로 아이가 계속 맞고 다니는 경우다. 내 자녀가 집단 위계 서열의 맨 밑바닥에 있다면, 그리고 서열 높은 아이들이 내 아이를 때린다면 나는 아이를 당장 그곳에서 빼낼 것이다. 피해자가 피해를 당하는 한 가지 이유는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놈이라는 평판이 아이들 사이에 이미 퍼져 있기 때문이다. 또래집단이 갖고 있는 생각을 뒤집기는 매우 힘들다. 보통 이사는 또래집단을 잃거나 집단에서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이유가 되므로 아이에게 좋지 않게 작용한다. 하지만 또래집단이 아이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아이의 지위가 바닥이라면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겠는가.” (p.481)
저자는 계속해서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꿈을 칠할 빈 캔버스가 아니라고.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긴장을 풀고 양육을 즐기라고. 당신은 자녀를 완성시키지도, 파괴시키지도 못한다고. 자녀는 당신의 소유물도 아니고, 아이들은 스스로 미래를 자신들의 집단을 통해 만들어 나간다고. 아무리, 집 안에서 좋은 말로 나이스하게 양육해도 밖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아이들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부모의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바깥 세상이 보호 장갑을 끼고 아이를 살살 다뤄주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집에서는 ”네가 한 일이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을지 몰라도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이 미친 새끼가!“라는 말을 듣는다.” (p.499)
그러하다. 우리는 아이를 양육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부모의 역할이 모두가 아님을 인지하고, 아이의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나의 부모와 다른 인생을 살 듯이, 나의 자녀도 내가 생각하는 삶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민자 가정의 자녀가 굳이 부모가 사용하는 한국어를 쓰지 않고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듯이, 또래집단의 문화가 부모의 문화와 다르면 언제나 또래집단의 문화가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가 자녀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너무 과하게도 너무 덜하게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제대로 된 양육의 첫걸음이지 않을까 싶다.
양육가설, 주디스 리치 해리스 저, 최수근 옮김, 황상민 감수, 2017, 도서출판 이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