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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08. 2019

예고된 위기, 브라질 정치의 속살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 룰라에서 탄핵까지> 리뷰

<위기의 민주주의 : 룰라에서 탄핵까지>, 넷플릭스. 원제는 The edge of democracy. 번역된 제목처럼 edge에 '위기'라는 뜻이 있긴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다 보고 나니 '가장자리'라는 뜻으로 번역해도 좋았을 것 같다. 룰라 대통령이 의회에 의해 탄핵되고 사법부에 의해 구속된 것은 어쨌거나 민주적으로 확립된 절차를 거쳐 성립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왜 민주주의가 아니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가장자리라는 번역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여간, 제목부터 알 수 있듯 브라질 정세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좌파 성향의 페미니스트 브라질리안이 촬영했고, 다소 지루하게도 본인이 직접 나레이션까지 했다. 아무래도 현재진행형의 정세를 정치성향 뚜렷한 사람이 1인칭 시점으로 담은 까닭에 사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는지 반룰라 시위대나 정치인들을 직접 인터뷰한 대목들이 눈에 띈다. 또 이 감독의 부모가 운동가 출신으로 룰라, 지우마 호세프의 소싯적 동지인 덕에 그 연으로 룰라와 지우마를 상당히 가까이에서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룰라 구속과 지우마 탄핵에 대해서는 이 다큐멘터리만 보고 무어라 얘기하긴 어려울 것 같다. 아무래도 주관이 뚜렷한 다큐멘터리니까. 게다가 이 다큐 안에서 룰라가 받는 혐의에 대해 뭔가 명확하게 반대 근거를 늘어놓는 것 같지도 않다. 그를 탄핵하려 하는 반대세력의 반동의 역사와 불분명한 정황증거가 반대 근거의 전부처럼 느껴질 정도.



대신 브라질의 시민운동과 의회를 한 번에 관찰할 수 있다는 엄청난 효용이 있다. 이건 그 자신이 좌파 운동가 출신이자,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룰라/지우마와 친분이 있는 감독의 위치 덕분에 가능한 것.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영웅적인 대통령 개인'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정치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가 가장 내 눈에 띄었다. 룰라 개인이 조금 부패했으면 어떤가? (물론 이것의 진실은 미확정 상태다.) 룰라의 정책이 퇴임 순간에도 80%의 지지율을 유지할 만큼 유의미한 것이라면 '룰라를 잃은 룰라주의'가 다시 그 자리에 올랐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룰라주의는 정치적 자원을 룰라에 몰빵한 탓에 룰라가 부패의 온상으로 낙인 찍히자 급격히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행정부에 거의 모든 정치적 기대를 쏟아붓는 정치는 어찌 되었든 작동하는 삼권분립 민주주의에서 취약한 상태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 즉 의회 다수당을 점하는 데 충분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은 까닭에 의회가 자신의 권리인 탄핵소추를 함부로 꺼내들게 방치한 것이다. 이 지점은 아예 감독의 나레이션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브라질 국민들이 의회에 관심을 가진 건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600명의 정치인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상황이죠." 정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만큼 정치적인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기억나는 장면. 룰라를 지키려는 시위대의 구호. "룰라, 브라질 국민의 전사!" 어떤 기사에서는 국민을 '민중'이라고 번역한 곳도 있다. 스페인어인 까닭에 원 단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이든 민중이든 저 수식어가 흥미로웠다. 적어도 카메라가 잡아낸 한에서 친룰라 시위대는 순수한 열정을 보였고(예를 들어 촛불시민처럼), 반룰라 시위대는 난폭하고 반도덕적인 폭력성을 보였다(예를 들어 태극기부대처럼). 카메라가 선택적으로 잡아냈을 거라는 의심이 조금 있다.


그리고 의회의 연설도 흥미롭다. 탄핵소추안에 대한 표결을 하는데, 한국 국회처럼 무기명 전자투표를 하는 게 아니다. 의원들이 한 명씩 의장석을 마주보는 자리에 서서 자기가 탄핵에 찬성/반대하는 이유를 말하고 최종적인 표결 의사를 밝힌다. 당연히 이런 모습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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