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내도의 봄
붉은 동백 한번 제대로 보는 일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몰랐네.
몇 해 전부터 기회를 보며 서해안 마량리로, 3천 그루 군락을 이룬 선운사로 개화 소문을 맞춰
가봤지만 절정의 순간을 놓치고 먼 여행길에 지역 식도락만 즐기다 오곤 했다.
오래전 친구의 연애사에서 가져온 눈물처럼 후두둑 졌다는 선운사 동백의 잎 한 아름을 보긴 했는데
그땐 너무 젊어 강렬한 꽃무리와 초록의 견고한 잎들이 지닌 기품이나 낙화의 퍼포먼스가 주는
의미도 몰랐다. 인간은 한 번의 생을 살아 그 틈틈이 사랑하고 일하고 자식도 기른다.
이제 살아온 날들보다 남은 날이 적음을 알면서 꽃대궁채 무거운 머리를 미련 없이 툭툭 던져
생을 마감하는 동백꽃의 마무리가 남다르다는 것을 안다.
이해인 수녀님의 피 흐르듯 낙화하는 동백을 보며 쓰신 시 한 구절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거부하고
편히 살고 싶은 생각들
쌓이고 쌓이면 죄가 될 것 같아서... "
한평생 헌신의 삶을 사셨을 수녀님이 할 반성은 아니고 우리같은 이기적 인간에겐 각성이 오는 구절이다.
사랑을 이야기한 수많은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로는 꽃 중에 으뜸이라니 내가 걷는 발아래 낙화의
흔적도 예사롭지 않아 산책길에 한 컷...!
거제 내도는 추운 겨울을 빨리 벗어나는 남쪽바다에서도 깊숙이 들어가는,
그래서 이른 동백이 만개할 거라는 또 토종 동백의 서식처라는 기대감으로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활활타는 개화를 볼 거라 기대하며 따라 나선 여행지였다.
구조라항에서 작은 배를 타고 선장님의 사투리 멘트를 즐기며 들어선 내도는 정말 단 한 채의
노란색 펜션만 가진 외딴 곳이었다. 우리가 무슨 짓을 벌여도 모를 듯한 이곳. 건강한 마음을 가진 이들의
작은 음악회를 즐기고 숯불 바베큐도 얻어먹으며 해 질 녘 아름다운 바다를 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백은 이미 지고 그 흔적들만 길 위에 붉다. 분분한 낙화....
바다인 지 호수인 지 모를 듯한(파도 소리조차 없던) 물가의 침실에서 하룻밤을 새고 아침녘
커피 타임에 우리는 좋은 사람과 여기 오고 싶다는 상습적인 감탄을 하다가 선배에게 듣는다.
"좋은 놈은 없다. 좀 덜 나쁜 놈이 있을 뿐... " 멘토 같은 진리에 항상 감탄을 ㅎ...!
그 후 우리는 남해 바다 특산물로 장보기나 잘해서 윗 지방에 귀한 콩잎 장아찌, 멍게 젓갈, 좋은
해초같은 것들로 집의 식탁을 며칠 간 행복하게 했다.
이렇게 통영의 봄은 어시장에서 온다. 박경리, 청마 유치환, 윤이상 같은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을
배출한 곳이지만 그것보다 곧 있을 도다리 쑥국이나 멸치 쌈밥 같은 미각으로 이곳을 더 기억하곤 하겠지.
이번에도 지역 시장통에서 배를 불렸다.
남쪽 섬 거제와 통영...!,
어릴 적 고향 가까울 때는 잘 안 오던 곳을
오히려 몇 시간씩 달려서 찾아오고 있으니
사람 사는 게 참 재밌다.
완벽한 경상도 억양의, 내겐 그리움 같은
아줌마들이 끊임없이 내다 주는 밑반찬과
어시장에서 갓 잡은 싱싱하고 찰진 회를
생미역 같은 진한 해초들에 곁들여 먹고
금세 1kg의 몸무게를 늘리고 왔다.
새로운 지도안을 준비하며 밤낮이 바뀌어서 새벽에야 잠자리에 들던 몸에 제대로 영양분을 좀 줬나 싶다.
넬슨이 연주한 피아노 1,2번을 듣다 듣다 잠들던 젊은 날의 그 밤들이나 죽을 만큼 사는 게 타이트하던 시절의 지구촌 여행길도 휴식과 놀이보다 명인들의 유적지를 찾아 헤매던 그 가치는 뭐였을까?
요즘같이 나를 내려 놓고 무심히 즐긴 적이 없네.
인생 선배 한 분이 옆자리서 건네준 중국 한시의 몇 구절이 또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