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선셋, 불갑사 꽃무릇
9월의 상사화를 보러 갔어. 예전에 덥고 난분분해 보이던 사원 근처의 붉은 꽃무리를...
어찌 이리 폐부를 찌르는 선홍이었나 마음 한 편이 놀라고 있었어.
우리는 자주 사랑에 대해 냉소적 반응을
보이곤 했지. 당연히 제대로 된 열정의 사랑은
가져볼 생각도 없이 눈앞에 놓인 삶에 지쳐
살았을 거야.
요즘 다시 문정희의 시집을 보다가
그 전라를 드러내는 발칙한 발상들 뒤에
사랑의 본질을 놓지 않는 기품도 있다는 걸
깨닫게 돼. 붉은 꽃더미에 곁을 준
산사처럼....
지난주엔 읽고 있던 소설까지 달고 일주일의 제주여행을 따라갔어.
가을 바다를 보는 멋진 섬여행이 될 거라 기대했지. 지난날 아이들과 숨 가쁘게 치러 낸 몇 차례의
수학여행으로 남들 다 좋아하는 제주엔 전혀 흥미 없이 살았지만 일로서가 아닌 즐기는 여행객이 되어 보는 첫 꿈을 가진 거야.
숙소를 향하던 버스길에 처음 본 거리의 집들은
아기자기했지만 북제주의 거리는 대부분 낡고 때 묻은 건물들이 많은 구도시였어. 항상 생각하는 돌담 낮은 제주와는 또 다른 민낯이었지.
근데 일주일을 머물고 떠나와서 그 어두웠던
거리를 다시 걸어보고 싶어지는 이 기분은 뭔지?
은빛 갈치가 싱싱하던 동문시장을 혼자 나섰다가 밤거리에서 인터넷으로 길을 찾아주던 씩씩한 남학생들과 불 밝힌 양품점의 친절한 아가씨를 만난 건- 갈대로 엮은 여름가방을 하나 사주긴 했지만
-현실 제주도민을 만나 본 좋은 기억들이 됐지.
일주일의 동선을 눈여겨보다 애초에 자주 갔던 유명 관광지는 안 따라가고 어느 푸른 해변에선가
가져간 책이나 다 떼고 와야지 또는 이중섭의 오래 된 그림이나 보고 와야지 했던 우리 식의 여유는 없어졌어.
매일매일 한두 곳이 함께 하고 싶은 곳이었거든... 비 온 후 비자림이나 처음 가보는 우도같이 기가 막힌
자연 속을 걷는 것 말이야.
사실 9월 치고 날씨가 너무 더워서 햇볕 속을 오래 걷는 것, 열심히 사진 찍어대기 이런 게 좀 귀찮아져서
머릿속에 담긴 만큼의 사진을 남기지 못한 건 좀 아쉽네.
물빛이 너무 깊어 꼭 다시 와 수영해보고 싶던 함덕과 푸른 하늘과 바다빛에 눈을 뜰 수 조차 없던
협재 해변, 함덕에서는 가을이었지만 몸 좋은 외국인 수영객이 많았는데 그 민트빛 물살에는 나도 한번
잠겨 보고 싶더라. 외국 해변에서는 노인(?) 수영객이 흔한데 우리는 그게 또 귀하네요.
해변카페는 붐비지만 않는다면 최고 수준의 배경과 베이커리라 추천하고 싶어. 언젠가 좋은 계절에
함께였던 좋은 이들과 다시 앉아보고 싶을 곳이야.
비를 피해 뛰어들어 선 우도의 이층 카페는
세찬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너머로 파도와 흰 등대,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풀들이 어우러진 전망이
아일랜드 여행사진을 닮은.. ㅎ
비 덕분에 오래 쉬었던 찻집이야.
싱싱한 물회와 회국수를 먹을 수 있는
어부의 가게, 오후 수영하기에 좋은 작은 해변이
코앞에 있는 숙소들... 아무튼 이 동네는
느린 여행하기에 정석인 것 같아.
여행 후 후배샘에게 업무에 인생 다 주지 말고
꼭 다녀 가라 추천했지만
눈앞의 일 중독자들이라 잘 안될 거야. 아마
우리가 그러했듯...!
이 여행의 마무리는 제주바다 보트 위에서의
선셋인데 문장으론 표현할 수 없는
파스텔 오렌지 빛이 서서히 하늘과 바다로 번져
가던 2시간 여의 항해를 했어.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놀거나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과의 교류도 좀 하고
선실 위로 가 저마다의 자세로 선셋 배경의 멋진
사진을 하나씩 얻기도 했지.
해가 수평선에 닿을 무렵 더 화려해지던 바다, 모두가 말수를 줄였어.
그리곤 생 날 것의 감정선들이 숨겨 둔 날개를 털며 저마다 지는 햇살에 몸을 던지던 순간이야.
그것이 무엇이든...!
긴 병을 견디는 멋진 내 친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