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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뾲파의 휴직일기 ep.09] 변화

인생은 산타를 믿었다가, 믿지 않았다가, 결국 산타가 되는 과정이 아닐까

by 뾲파

난 겁이 좀 많다.

좋게 포장하자면, 조심스러운 편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는 말을 맹신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라는 말을 즐겨하며

나를 안 좋게 평가하면 어떡하지, 라는 다소 쓸데없는 생각에 이따금 사로잡히곤 한다.


얼마 전, 좋은 기회로 홍보 전문가로 선정되어 국제 콘퍼런스를 자문할 일이 생겼다.

자문 미팅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내 경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저명한 교수부터 한 사업체의 대표 등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게 맞나, 싶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경력이 짧다는 것은 그만큼 나이도 어릴 확률이 높으므로

그곳에서 내가 제일 어려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자리에서 나는 겁을 먹고 쫄아(?) 있는 것이 맞다만,

이날은 왠지 그러지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미팅 내내 이렇게 되뇌었던 것 같다.


'나도 한 아이의 아빠고 가장인데

쫄 게 뭐 있냐.

저 사람들도 결국 나랑 같은

남편이자 부인이자

애아빠이자 애엄마일 텐데.'


우습지만,

이 주문은 내게 꽤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긴장도 풀렸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난, 이전과는 다른 것을 많이 느낀다.

이토록 긍정적인 변화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있다.


나는 161일 차 육아 아빠다.

그리고 나는, 육아 휴직 중이다.




육아에 열중하는 요즘, 많은 것이 변했다.

아이의 탄생과 함께 내 삶이 송두리째 달라졌다.


우선 잠이 많아졌고, 자주 피로해졌다.

쪽잠을 자는 버릇해서 틈만 나면 잠을 청하려 한다.

생존을 위한 본능인가, 생각되기도 한다.


외출 습관도 사뭇 다르다.

나갈 준비를 한다는 건,

나의 소지품을 챙기는 것이었지만

이제 나의 휴대폰과 지갑은 뒷전이다.

아이의 분유통, 포트기, 손수건, 옷가지, 그리고 장난감을 최우선으로 챙긴다.

그러다 내 짐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곤, 아차차, 한다.


배달 음식과 과자를 즐겨 먹던 식습관도

아이를 위해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에 달라졌고

집을 떠날 때면 전과 달리 빠르게 귀가하게 되는 것도 다르다.

결국 내가 밖에 오래 있으면

아내가 힘들 것이므로.


커리어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회사와 업계 소식은 뒷전이고

사람을 좋아해서 하루 종일 통화 내역이 꽉 찼지만

이젠 친한 동료들이나 기자들과도 연락이 두절된 지 꽤 됐다.

사실은, 신경 쓸 겨를도 없다는 편에 가깝다.


친구들이나 가족들 안부를 물었던 적도 까마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를 '무조건' 갈구하던 지난날이었지만

이제는 자유가 주어져도

집에 있는 아이가 보고 싶다.

이 점도 전과는 다르다.




하루는, 홀로 육아 용품을 당근하러 가는 길이었다.

마침 퇴근 시간이 겹쳐 거리엔 차가 많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휴직 전 퇴근길에 늘 들었던 라디오가 흘러나와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정차 중에 라디오 사연에 귀를 기울였다.


나처럼 육아 중인 한 엄마의 이야기였다.

평소 여행을 좋아했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엔 가지 못해 우울하다는, 그런 사연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연에 공감 가는 구절이 있었다.


'그렇던 제가, 이렇게 바뀐 걸 보면 신기해요'


이윽고, 신청곡의 선율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O My Baby 놀라운 세상
내가 바뀌어진 하루
너 우리에게 온 날부터

O My Baby I Love You
맘 것 기지개를 펴
너의 걸어가야 할 길은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름다워


가사가 무척 공감됐다.


'내가 이렇다고...?'

'이렇게 바뀌다니...'

'이럴 줄은 몰랐는데...'


신기하고, 우스웠다.


겁이 많은 나는,

육아 난이도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육아 중 나의 삶에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뭐 별 거 있겠어,

선배들도 다 했는데 뭘,

하곤 쉽게 여긴 것 같다.

건방지게도.


그런데 걱정하는 방향이 달랐던 것 같다.

나의 삶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

나의 삶이 대거 사라지는 변화.

아 이게 육아구나.


그리고 한편으론,

부정적으로만 바라봤던 이 세상이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장차 살아가야 할 세상이라 생각하니

조금 더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았다.


나쁘지만은 않은,

때때론 아이를 안고 있는 내게

아기 아빠가 힘들어 보인다며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세상,

바쁜 와중에도

아이의 얼굴을 보곤

환하게 웃어주는 그런 세상.


그러다 문득, 코 끝이 찡해졌다.

멜로디엔 이런 가사가 묻어져 나왔다.


이 멜로디 니가 따라 할 때쯤엔
얘기 나눌 수 있겠지
너에게 듣고 싶은
너의 생각
또 너의 세상

또 다른 사랑
내게 가르쳐 준
Oh My Baby 널 사랑해
또 다른 기적
오 또 다른 선물
Oh My Baby 널 사랑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큰 고통 속에서

또 다른 기적과 선물을 안겨준, 고생한 아내가

그리고 어리숙하고 부족했던 내게

또 다른 세상과 사랑을 가르쳐준,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가

집에 있는 내 사람들이

보고 싶어 졌다.



누군가는 말했다.


인생은 산타클로스를 믿었다가,

믿지 않았다가,

결국엔 내가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우린 변해가고 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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