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smine Sep 08. 2023

사색에도 요령이 있나요?

자스민의 중고영화 <안경>


어떤 영화들은 감상하기에 앞서 관객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준비하게끔 한다. 논리적인 영화라면 복잡한 서사와 치밀한 영화적 장치들을 분석함으로써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감성적인 영화라면 감정에 몰입할 수 있는 상태여야 감동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최근에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져 어떤 영화도 소화시키기가 어려웠다.


더 이상의 친목 모임이나 야외 활동도 크게 즐겁지 않고, 금세 체력이 방전되어 쉬는 날에도 누워만 있는 날들. 여름의 끝을 붙잡고 며칠을 몰아서 휴가를 지내고서는 지독한 독감으로 링거의 위력을 몸소 맛봐야 했다. 밈으로나 접했던 ‘체력 이슈’가 내 이야기가 되고 보니 디스턴스를 위해서라도 아무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영화를 찾아야 했다.


어떠한 판단도 배제하고 감정적 동요 없이도 소화해낼 수 있는 영화.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게 아닌데도 문득문득 잔상이 떠오르던 <안경>이라는 영화를 다시 보게 된 이유이다.



자극적이지 않은 일본 영화를 하나의 장르라고 따지면, <안경>은 그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을 만치 굳건하게 왕좌를 차지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만큼은 어떤 상태에서라도 무리 없이 소화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영화 감상에 앞서 만나게 되는 <안경>의 포스터는 왠지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바닷가에 한 줄로 서서 요가 동작 같은 자세를 동시에 취하고 있는 사람들. 멋진 동작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들의 공통점이라곤 영화 제목처럼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 정도이려나.


<안경> 보도스틸 | 제공: 스폰지



<안경>은 일본 남쪽 어딘가의 이름 없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해변에는 어울리지 않는 검정치마에 꼭 여민 가디건 차림으로 등장하는 한 여인. 캐리어를 끌면서 모래사장을 지나 도착한 곳은 간판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스트하우스다. 손님의 흔적이라곤 보기 힘든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손뼘 만한 간판을 가리켜 ‘간판을 크게 내걸면 손님들이 몰릴 테니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초봄에 방문한 손님도, 헤매지 않고 온 손님도 3년 만이라며 길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여기에 있을 재능’이 있다고 말한다.


어딘지 독특한 인물들이 모여 재미난 사건이 하나쯤 일어날 법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극적인 전개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루하리만치 단조로운 일상에 이틀 만에 ‘무리’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손님이 게스트하우스를 탈주하려는 시도 정도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과장된 앵글도 화려한 카메라 워크도 극적인 배경음악이나 효과음도 없다. 다만, 사색을 잘 하는 요령이 있는지를 질문하던 손님 또한 어느새 바닷가 마을의 풍경에 스며드는 나날을 관망하며 보여줄 뿐이다.


매년 봄마다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온다는 또 한 명의 여인은 느긋한 손길로 빙수에 넣을 팥을 조리면서 ‘중요한 것은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색하는 것이 특기인 사람들이 모여있는 마을에 찾아온 이방인은 비로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얻은 듯, 점점 사색의 매력에 물들어 간다. 일정한 리듬으로 다가오는 파도 소리, 빙수 그릇에 숟가락이 부딪히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이따금 울리는 만돌린 연주 소리… <안경>을 보는 내내, 바닷가에 앉아 사색하는 기분으로 온몸에 힘을 풀게 되는 것이다.



사색을 스크린에 펼쳐 내다니. 새삼 이 또한 대단한 장기라는 생각이 든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니 최근에 개봉한 <강변의 무코리타> 라는 작품이 상영 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필요한 시간에 극장에 가볼까 한다.



해당 글은 뉴스레터 [디스턴스]에서 발행한 "자스민의 중고영화" 9번째 편입니다.

* 영화 정보를 포함한 전문 보기 >> (링크) 

* [디스턴스] 구독하기 >> (링크)


자스민의 중고영화 | 교복을 입고서 비디오 가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절에 영화감독의 꿈을 품고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영화를 찍고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영화 홍보마케터로 수년간 일하며 영화계의 쓴맛 단맛을 고루 섭취하고, 무럭무럭 자라 글 쓰는 마케터가 되었다. <자스민의 중고영화>에서는 스크린에 비친 장면들을 일상의 프레임으로 옮겨 그 간극(distance)을 헤아려볼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I am Groo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